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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3. 리뷰

[전시리뷰] 개인에서 공동체로 : 정아람 개인전 <나를 위한 말하기>(2018.10.5.~25)에 나타난 협력의 제스처

by ㅊㅈㅇ 2018. 12. 17.

개인에서 공동체로

: 정아람 개인전 <나를 위한 말하기>(2018.10.5.~25)에 나타난 협력의 제스처

1. 묻지마 테러와 그 결과

2013년 4월 15일, 미국 보스턴에서 마라톤 폭탄 테러가 있었다. 보스톤 마라톤 결승선에서 두 개의 폭탄이 터져 관중, 참가자, 시민 등이 다친 사건으로, 3명이 사망하고, 180여 명이 부상을 당한 사건이다. 시 당국은 대중교통의 운행을 중단하고, 상점이나 학교는 모두 문을 닫고, 용의자 체포에 모든 사람이 동참했고, 테러 발생 4일차, 용의자의 움직임이 발견된지 22시간만인, 4월 19일에 용의자를 체포하였다. 용의자는 형제로, 26세 타메를란 차르나예프와 19세 조하르 파르나예프이다. 두 형제가 대규모 테러집단과 연루돼 있을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이슬람권 출신 인생낙오자들이 이슬람 극단주의에 빠져 미국에 복수한다는 생각으로 ‘묻지마 테러’를 저지른 것이다.

시민들은 대피 지시에 충실히 따랐고, SNS를 이용해 테러범과 관련한 제보를 하거나 헌혈을 하는 등 협력하고 돕는 강한 공동체(Boston Strong)의 모습을 보여주었다.[각주:1] 2016년에는 <패트리어트 데이>라는 영화가 위 사건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이 영화는 생생한 현장의 분위기를 잘 전달했다는 평을 받는데, 무엇보다도 테러범을 잡기 위한 협력의 구도와 시민들 사이에 서로 긴밀한 도움을 주고받으며 긍정적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모습을 보여주는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사회 안의 한 개인이 불특정 다수에게 해를 끼쳤을 때, 나머지 모든 사람들이 합심하여 문제를 해결하고 치유하기 위한 노력의 과정이 깊은 감동을 주었다.

2. 강남역 살인사건이라는 공공의 ‘트라우마’

‘묻지마 테러’라는 점에서 비슷한 맥락을 보여주는 일이 한국에서도 있었다. 2016년 5월 17일 새벽에 30대 남성이 20대 여성을 흉기로 수차례 찔러 살인한 사건이다. 화장실에 숨어있던 피의자는 화장실에 들어온 남성 6명은 그냥 보내고, 이후에 들어온 여성을 살해한 것으로 밝혀졌다. CCTV와 주변 사람들의 증언으로 피의자는 금방 검거되었고, 그는 “여성들로부터 무시를 당해 범행을 저질렀으며, 피해자와는 모르는 사이”라고 진술하였다. ‘여성 혐오’가 사건의 근간을 이룬다는 점에서, 전혀 예측 불가한 상황에서 나 역시도 타겟이 되었을 수 있었다는 생각에 많은 여성들은 깊은 충격을 받았다. [각주:2]피의자에 관한 조사가 이루어진 이후, 그가 조현병이라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그러나 대한민국 대법원은 사회적 위험성을 고려해 2017년 4월 징역 30년을 선고하였다. 이후 한 네티즌의 제안으로 강남역 10번 출구에는 대규모 추모운동이 일어났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3만 5천 여 장의 포스트잇 메시지를 붙여두었는데, “그녀는 죽었고, 나는 우연히 살아남았다”와 같은 문구들은 많은 여성의 공감을 샀다.

개인에게 일어난 일임에도 불구하고 피의자와 피해자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이였다는 점에서, 강남역 살인사건은 한국에 살고 있는 많은 여성들에게 일종의 ‘트라우마’로 남았다. 한국여성 중 한명인 정아람은 이러한 사회적 트라우마를 예술로 재해석해내는 시도를 했다. <우연히 살아남은 내가 당연히 살아남았어야 할 너에게>(2016/2018)는 강남역 살인사건 추모 운동에서 붙어 있던 셀 수 없이 많은 포스트잇 메시지에서 반복적으로 발견되었던 ‘살아남다’라는 단어에서 시작하여, 이 단어가 포함된 문구들을 수집하여 하나의 이야기로 재구성하였다.

그렇게 만들어진 스크립트는 프롬프터에 재생되어 마이크 앞에 서는 누구라도 그것을 자신이 말하는 것처럼 읽을 수 있도록 연출됐다. 익명의 사람들이 쓴 추모의 메시지는 하나의 새로운 글로 탄생하였고, 관객은 누구나 그러한 메시지를 자신의 말처럼 하게 된다. 프롬프터 옆에서 함께 상영한 영상은 한국어가 모국어가 아닌 외국인이 그 원고를 읽는 모습을 녹화한 영상이다. 성폭력 문제에 대해서 말할 때에도 남자가 여자에 행하는 폭력에만 집중되어 있어, 남자가 남자에게, 여자가 남자에게 행하는 폭력은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과 마찬가지로, ‘여성 혐오’를 기반으로 한 사건이기에 남녀의 이분법적 대립 구도만 강조하는 데에서 문제의식을 느껴, 정아람은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이 겪을 차별이나 편견의 맥락과 중첩시켜 더욱 다층적인 구조를 조직해낸다. 정아람의 이러한 시도는 개인의 이야기를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만드는 힘을 가진다.

 

3. ‘불법촬영’과 잠재적 협력 체계

또 다른 작품 <Peer to Peer, Woman to Woman>(2018)은 또한 화제가 되었던 ‘화장실 몰카’를 다룬다. 지하철역, 커피전문점, 식당가 등 공중 여자화장실에서 몰래카메라 범죄가  셀 수 없이 많이 발견되었다. 사적인 공간으로 안전하게 보호받아야 할 공간에 몰래카메라를 숨겨놓고 촬영하여 불법 동영상을 온라인을 통해 판매 혹은 공유하는 방식의 범죄이다. 경찰청에 따르면, 이러한 몰카 범죄는 2011년 1523건이었다가, 2016년에는 5185건으로 늘었다.[각주:3]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이수정 교수는 인터넷 접속의 용이성, 첨단 초소형 카메라의 개발, 솜방망이 처벌 등이 이러한 범죄가 계속 일어나는 이유로 추정하였다.[각주:4] 일부 과격한 여초 사이트에서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전략인 ‘미러링’의 방식으로, 남자화장실에 몰카를 설치하고 해당 영상을 게시판에 올리기도 하였다.

정아람은 <Peer to Peer, Woman to Woman>(2018)에서 몰카 사건을 여성 사이의 연대, 잠재적 협력가능성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다루고 있다. 전시장 안에는 공중 화장실을 연상시키는, 나무로 만든 큐비클을 설치한 뒤, 그 바깥에는 초소형 카메라로 찍은 여성 연대의 시위 모습을 공개하였고, 안쪽에는 수십 개의 구멍이 뚫린 벽과 화장실의 두루마리 휴지를 쌓아두었다. 몰래카메라를 이용해 촬영을 하는 방식은 언뜻 ‘미러링’의 방식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이 남성화장실 내부를 찍은 것이 아니라, 시위 현장에서 가면 등을 쓴 익명의 여성의 모습을 찍었다는 점에서 미러링이 아니다.

SNS를 비롯한 온라인 사이트들을 활용하여 여성들은 어느 지역, 어느 화장실, 몇 번째 칸에 몰래카메라가 설치되었는지 정보를 공유하였는데, 이러한 단서들을 좇아 정아람은 초소형 스캐너를 잡은 손의 움직임을 통해 벽 구멍을 막은 타인의 흔적을 스캐닝하는 것을 실시간으로 동영상 기록했다. 실제로 많은 여성들은 화장실에 갈 때, 송곳과 같은 뾰족한 물건을 가지고 다니면서 작은 구멍 안에 그것을 집어넣어 카메라를 파괴하거나, 혹은 두루마리 휴지를 얇게 말아서 구멍으로 의심되는 모든 곳에 다 집어넣어 촬영으로부터 자신을 포함한 여성들을 보호하려 했다. 큐비클 안에 비치된 휴지로 구멍을 막는 행위는, 개인의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한 잠재적 협력의 공간으로 화장실을 탈바꿈하려는 시도였다. 여성 뿐만 아니라 남성 관객 역시 정아람의 이러한 작품을 마주하면서, 불법촬영이라는 불안감에 떨었을 수많은 여성들의 상황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고, 서로가 서로를 돕기 위해 구멍을 막는 행위에 동참하게 된다.

4. 신체적 접촉을 통한 협력의 과정

“#03. 1. 나는 너의 뒤에서 너가 맨 배낭을 두 손으로 잡아 당기며 움직인다. 2. 나는 너의 뒤편에서 겨드랑이 아래를 각각 잡고서 내 쪽으로 당기면서 가능한 한 직선을 유지하며 다리의 힘으로 천천히 움직인다. 3. 나는 너의 머리 쪽에 앉아서 양쪽 손을 너의 어깨 아래에 놓고 앉은 자세가 되게끔 들어 올린다. 4. 너의 겨드랑이 밑으로 손을 넣어 나의 오른손으로는 너의 왼쪽 팔을, 나의 왼손으로는 너의 오른쪽 손목을 잡아 내 쪽으로 당긴다. 5. 나는 너의 다리 쪽에 앉아 두 손으로 너의 무릎을 굽혀 그 아래를 잡고 일어서며 너를 들어올려 움직인다.”[각주:5]

위의 텍스트는 정아람은 시위 진압 장면에서 관찰한 행위로 만든 퍼포먼스를 위한 일종의 매뉴얼의 일부분이다. 공공의 이름으로 개인에게 가해지는 신체 접촉을 텍스트화된 매뉴얼로 번역한 것이다. 텍스트만 읽어보면 ‘시위 진압’의 모습이 바로 그려지지는 않는다. 정아람은 이러한 텍스트를 기반으로 서울 도심의 공공장소에서 여성 퍼포머들이 퍼포먼스 시연을 하는 모습을 담은 영상을 담아 <공공 신체 프로토콜>(2015/2018)이라는 작품을 만들었다. 여성 퍼포머들이 영상에서 행하고 있는 행위는 ‘진압’이라기 보다는, 서로 의지하며 보조하는 협업의 제스처로 보인다.

2015년에는 종각, 종로, 시청 등 비롯한 서울의 중심지에서 퍼포먼스를 진행하였다면, 2018년에는 전시가 이루어지고 있는 방배동 까페골목에 위치한 스페이스윌링앤딜링 주변에서 이루어졌다. 작가는 전시가 이루어지는 장소에 맞추어 계속해서 퍼포먼스를 진행할 수 있는데, 퍼포먼스가 이루어지는 장소의 맥락에 따라 같은 퍼포먼스이지만 다른 의미를 생성할 수 있다. 방배동에서의 퍼포먼스는 공적인 시위의 맥락에서 더 많이 떨어져 나와 더욱 일상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응급환자의 구조 모습처럼 보인다. ‘진압’의 몸짓이 상호의존하고 서로 보조하는 협업자들의 관계적 행위처럼 보이게 된 데에는, 모든 퍼포머가 전부 여성이라는 점, 그리고 매우 느린 속도로 매뉴얼에 따라 움직인다는 점, 일상적인 옷을 입고있다는 점 등을 이유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스페이스윌링앤딜링에서 열린 정아람 개인전 <나를 위한 말하기>(2018.10.5.~25)는 여성혐오가 기반이 된 혹은 그것과 연관된 일련의 사건들-강남역 살인사건, 불법촬영, 여성혐오 반대 시위-등을 직간접적으로 다루고 있다. 정아람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입장을 취하기 위해 부단히 고민하고 노력한 듯 보인다. 극단주의 페미니스트의 과격한 행동에 경도되지도, 또한 무고한 남성 전체를 잠재적 범죄자로 본다며 반발하는 몇몇 남성의 입장에 휩쓸리지도 않은 채, 묵묵히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한 사회에서 일어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그러한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끊임없이 대화하고 또한 앞으로 비슷한 일이 반복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함께 노력해야한다는, 가장 단순하고도 명징한 명제를 다시 한 번 상기시키려는 듯하다.



  1. 전정윤, “보스턴 폭탄 테러 사건, 용의자 정원 체포로 종료”, 한계레, 2013.4.20.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583769.html [본문으로]
  2. “강남역 여성 살인에 대한 여성혐오적 시선을 혐오한다”, 경향신문, 2016.5.19 [본문으로]
  3. 신지민 기자, “”화장실 몰카 기승에 몰카 금지 응급 키트 등장“, 한겨레, 2018.2.13.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32179.html [본문으로]
  4. 이수정 교수, “대한민국 몰카 공포... 원인과 대책은?”, YTN, 2015.9.1. https://www.ytn.co.kr/_ln/0105_201509011051317571 [본문으로]
  5. 정아람, <공공 신체 프로토콜>(2018)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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