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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7. 번역, 요약

제도비판미술

by ㅊㅈㅇ 2019. 3. 16.

제도비판(institutional critique) 미술

 

20세기 중반의 미술에서는 미술의 영역을 사회, 정치, 경제적 권력이 가담하는 다른 영역으로 분리해 왔으며, 미적 자율성을 강조했다. 자율성에 대한 환상을 극단으로 밀어붙인 예가 바로 추상표현주의 미술이다. 가장 순수한 형식주의 미술의 완성으로 대두된 추상표현주의 미술은 세계미술계를 제패하려는 미국의 욕망과 권력 기제들에 의해 후원되어 왔다. 1960년대 말, 추상미술은 격렬한 비판으로 그 힘을 상실하고 있었음에도, 당시 제도권 미술관에서 미술의 자율성 이라는 개념은 여전히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미술관은 외부의 환경적 영향에서 자유로운,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성역화된 공간이어야 했다.

미술제도란 교육기관, 전시기구, 언론사, 정부 등 작품이 생산, 유통되는 과정에서 관련된 다양한 기구는 물론, 작가, 큐레이터, 비평가, 컬렉터 등 이들 기관을 움직이는 사람까지를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다. 제도비판은 이러한 미술제도가 은닉해왔던 미술의 정치적, 경제적 기반 및 이데올로기를 드러내는 데 중점을 둔다.

1910년대 마르셀 뒤샹의 레디메이드는 제도비판의 원류로 볼 수 있다. 대량 생산된 소변기를 뒤집어 사인하는 방식으로, 그는 기존 예술관에 도전하였으며, 동시에 소변기에 대한 검열 소동은 이마저도 작품으로 만들 수 있는 미술제도의 존재를 확인시켰다.

그러나 본격적인 제도비판은 1960년대 후반 반문화 정서와 함께 출현했다. 한스 하케, 다니엘 뷔렝, 마르셀 브로타에스, 마이클 애셔는 모두 기존 사회제도가 지배 이데올로기를 확대 재생산하는 억압구조라는 당대의 문제의식을 공유하였으며, 미술 제도 역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다니엘 뷔렝

다니엘 뷔렝은 미술가 그룹 BMPT 에서 활동하며 1967년 청년작가전에 참여하였는데, 줄무늬와 도트를 연상시키는 공동작업을 출품하고, 오프닝 다음날 자신들의 작품이 예술품이 아니라고 선언한 후 전시장에서 작품을 철거했다. 당시 미술계에 유행하고 있던 옵아트는 패션이나 인테리어 형태로 미술관 밖에서도 큰 인기였다. BMPT는 미술관 밖에서는 천에 불과한 것이 미술관 안에서는 예술품으로 대우받는 것은, 미술제도의 일원인 작가가 전시라는 기제를 통해 천을 선보였기 때문이라고 판단한 것이었다. 이들의 이 해프닝은 사물에 작품의 자격을 부여하는 미술제도의 권력을 보여준 사례이다.

</캔버스, 캔버스/>(1975)

뷔렝은 단색 줄무늬 패턴을 작업에서 지속적으로 사용해왔다. 9척의 보트가 경주를 하여서 도착지점에 들어온 순서대로 흰벽에 걸어둔 작업이다. 뷔렝은 특정 장소와 상황을 참조해 비예술적 사물과의 관계를 작품의 형식과 내용으로 삼았다. 이러한 작업 방식을 in situ 라는 용어로 설명해왔다. 뷔렝은 거리에 설치된 광고판, 지하철, 돛단배 등 비예술적 장소에 반복적으로 줄무늬 패턴을 설치했다. 뷔렝은 어떻게 비예술적 장소와 예술적 장소의 이분법을 극복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줄무늬 천이 배에 부착되어 있을 때에는 돛이 되고, 전시장 안에 부착되었을 때에는 장식적 형태를 갖춘 캔버스가 된다. 이 작업은 미니멀리즘에 대한 비판으로도 읽을 수 있다. 동일한 사물이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갖게 되는 근거가 무엇인지 질문을 던진다.



 

마이클 애셔

뷔렝이 전시 관례와 회화적 평면에 주목했다면, 애셔의 경우는 전시 장소의 공간 구조 분석에 초점을 맞춘다. 작가는 갤러리에서 벽면과 바닥 그리고 천장에 칠해진 흰 페인트를 벗겨낼 것을 요청하였다. 그는 전시장을 날 것 그대로의 표면을 드러내 전시 공간 자체를 대상화했다. 전시장 벽면에서 페인트를 제거하는 것이 회화에서 이차원 평면에 재료를 가감하는 전통적 과정을 지시하는 것이었다. 애셔는 전시공간과 사무공간을 분리하는 벽을 제거하고 벽에 있는 깨진 흔적을 말끔하게 지워 균질하고 연속적 공간으로 변형했다. 전시장에 들어온 관객은 갤러리 관계자가 일하는 모습을 직접 볼 수 있게 되었다. 이 작업은 갤러리가 작품의 진정한 의미와 미적 가치에 준거를 두는 것이 아니라 갤러리 관계자가 미술 사업을 하는 공간이며 미적인 사용가치를 교환가치로 변형하는 곳임을 드러낸다.

18세기 말 프랑스의 장-앙투안 우동이 제작한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입상. 이 조각은 많은 미국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덕분에 우동의 대리석 원작을 청동으로 복제한 작품이 미국 곳곳에 있는데, 그중 한점이 시카고미술관 건물 전면에 서 있다. 미국 3대박물관으로 손꼽히는 시카고미술관의 웅장한 건물을 등지고 높은 대좌 위에 선 워싱턴 상은 미술관을 드나드는 이들에게 미국의 도립과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각인되었을 것이다. 마이클 애셔는 시카고미술관에서 열린 <미국미술전>(1979)에 초대되었고,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 출품하지 않는 대신, 워싱턴 동상을 대좌에서 끌어내려 219번 갤러리인 18세기 유럽 미술 전시실 한가운데 세워두었다. 애초에 18세기 프랑스 조각가의 작품이니, 따지고 보면 애셔가 제 자리를 찾아준 것이다. 그런데 자리만 바꾸었을 뿐인데도 이 조각의 의미는 완전히 달라졌다. ‘미국의 상징에서 유럽의 미술로 변모하는 데에는 이렇듯 몇 미터의 거리만 옮기면 되는 일이었다. 동일한 대상일지라도 어떤 맥락에서 보느냐에 따라 그 의미와 가치가 달라질 수 있음을 단순 명료하게 보여준 작품이다.

 


한스 하케

그는 미술 전시의 자의성이라는 제도비판의 통상적 주제는 물론이거니와, 전시후원, 기업 컬렉션, 공공조형물 등에 주목해 이와 같은 미술제도가 어떠한 정치, 경제적 이해관계를 가진 이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으며, 이들의 사적인 이해관계가 미술제도 운영에 어떤 방식으로 반영되는지 추적했다. 특히 그는 제3세계 부패정권과 다국적 기업의 결탁, 그리고 자본의 흐름을 통해 이들과 연결된 미술제도의 실상을 신랄하게 파헤침으로써 미술을 순수한 정신의 영역으로 한정시키려는 모더니즘 예술관의 허구성을 폭로했다.

한스 하케의 작업이 본격적인 제도비판미술로 변모한 것은 1969~70년으로 추정된다. 하케가 초기부터 관여했던 AWC(Artist Workers ‘ Coalition, 1969-72)는 미술관과 작가의 불평등한 관계를 개선하겠다는 현실적인 목표에서 시작해, 미술관의 이데올로기 국가 기구적 성격을 비판하는 데까지 나아간 좌파 성향의 단체였다. 미술관 이사회와 군대, 산업체의 연관관계나 미술 후원의 목적에 대한 문제의식은 1970년대 이후 하케의 주제의식과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모마 투표(MoMA Poll)>(1970)

모마 이사회와 베트남 전의 관계를 비판하기 위해 모마라는 전시 장소의 맥락을 적극적으로 이용한 예이다. 하케가 속해있던 AWC는 미술관 이사진들을 통해 모마가 베트남전과 연관돼 있다는 주장을 제기하고 있었다. 작품에서 하케는 록펠러 뉴욕 주지사가 닉슨 대통령의 인도 차이나 정착에 이의 제기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다가오는 주지사 선거에서 록펠러를 뽑지 않을 이유가 되는가?라는 질문을 투표에 부쳤다. 록펠러 주지사는 모마의 설립과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록펠러 가문 소속의 정치인이자, 한때 모마의 이사장직을 맡았던 인물이다. 이 투표에서 참여자의 70%는 그렇다에 표를 던졌다. 즉 투표 참여자의 대다수는 인도차이나 정책에 대한 록펠러의 입장에 불만을 표시한 것이다. 작품 속 질문의 뉘앙스에서 느껴지듯이 하케는 그렇다는 대답을 유도하거나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듯싶다. 이것은 단순히 관객의 태도를 알아보기 위한 투표라기보다는 반전시위의 일환으로 기획된 것처럼 보인다. 하케는 베트남전에 대한 록펠러 가문의 책임을 묻기 위해 록펠러 가문의 미술관에서 록펠러와 닉슨 정권 사이의 관계를 비판한 것이다.


<샤폴스키 외, 맨하튼 부동산 보유현황, 실시간 사회 시스템 1971.5.1. 현재>(1971)

일반적으로 작가들이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캔버스나 물감 등의 재료를 가지고 작업을 한다면, 하케는 기사거리를 찾아다니는 기사처럼 시청의 기록보관소나 도서관, 서점을 오가며 정보를 수집했다. 정보에 대한 하케의 관심은 거의 강박증 수준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여느때처럼 자료를 열람하던 하케는, 할렘과 로어 이스트사이드 구역 주택 대부분이 샤폴스키 가문 및 이 가문과 관련된 업체에 의애 독점되고 있음을 발견했다. 이것이 1971년 구겐하임미술관에서 예정되어 있던 개인전이 취소된 결정적 이유가 되었던 작품 <샤폴스키 외, 맨하튼 부동산 보유현황, 실시간 사회시스템 1971.5.1. 현재>이다.

이 작품은 샤폴스키 가문과 관련된 건물 142개의 현황을 적은 142개의 문서로 이루어져 있다. 마치 부동산 매물 광고처럼 보이는 이 문서들에는 건물의 정면 사진, 주소, 저당 상태, 소유자 등이 기록돼 있다. 물론 제목에 기재된 51, 즉 노동절이라는 날짜가 자본가의 횡포를 비판하는 의미를 담고 있기는 하지만, 작품 자체는 관객의 감정을 자극하는 것 보다는 정보 전달 그 자체에 목적을 둔다.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1971년 열릴 예정이었던 한스 하케의 개인전 <체계들>은 오픈을 6주 앞두고 취소되었다. 관장 토마스 메서는 관객의 프로필 조사 작업과 맨하튼 부동산 소유 현황을 다룬 작업에 대해 전시 불가를 통보하였다. 메서는 미술관의 기능을 심미적인 것으로 한정함으로써 사회적, 정치적 문제와 직접적 연관관계를 맺는 것을 저지하려 했다.

 


<마네 프로젝트 74>(1974)

하케는 마네의 작품을 예술이 아닌 상품의 견지에서 조명했다. 이 작품은 독일 쾰른의 발라프-리하르츠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에두아르 마네의 <한 단의 아스파라거스>(1880) 작업과 그 주위로 이 작품을 소장했던 사람들의 인적 정보와 작품 가격을 적은 패널을 걸어두는 설치 작업이다. 하케가 마네의 이 작품을 선택한 것은 이 작품을 미술관에 들여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헤르만 압스 때문이지만, 그 어떤 사회적 사건도 지시하고 있지 않은 한단의 아스파라거스를 그린 이 순진무구한 그림 이면에 존재하는 예술과 사회, 예술과 자본의 관계가 강한 대조를 이루기 때문이다. 특히 마지막 패널은 작품이 미술관으로 들어온 직접적 경위를 설명하고 있는데, 미술관 수탁위원회가 작품을 입수하기 위해 수십개의 회사와 쾰른시의 영향력있는 인물을 동원해 기금을 마련하고 로비를 한 과정을 기술한다. 헤르만 압스는 전전 나치 협력자에서 전후 독일 재건의 주인공이자 예술 후원자로 변신한 인물이다. 이 작품을 미술관에 들여온 장본인이 압스였다는 사실은 그의 예술 후원 활동이 사회와의 관련성을 부정하는 예술의 아우라를 통해 자신의 과거 치부를 감추려는 시도의 일환은 아니었던가라는 의심을 품게 한다. 당시 관장인 켈너는 압스의 과거 행적을 언급한 마지막 패널이 부적절하다고 주장하였으며, 그의 순수한 의지를 보호해야할 의무가 있다고 밝혔다.

 



<구겐하임 미술관의 이사회>(1976)

뉴욕 현대미술계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구겐하임 미술관의 이사회에 주목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구겐하임 미술관 이사들의 명단 및 이들의 사회적 위치에 대한 정보를 6개의 문서로 정리한 것이다. 1974년 전체 13명의 이사 중 이사장을 포함한 4명의 이사가 구겐하임 가문 출신이었다. 이사 대부분은 광산업과 관련된 몇 개의 회사에 소속되어 한 회사에서는 이사, 다른 회사에서는 사장 등의 방식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 구겐하임 이사회는 가족관계 혹은 회사 임원진 등 서로 연결된 내부자 집단 이었다. 이사회가 비교적 동일한 이해관계를 가진 인물로 구성됐다는 사실은 미술관이 이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기관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시사한다.

하케가 미술제도를 비판하는 목적은 그것을 폐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대신 미술제도가 어떠한 관계망 속에서 작동하는 지 드러냄으로써 미술이 더 이상 순수한 정신적 활동이라는 이름 하에 이데올로기적으로 오용되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다.

하케는 미술관이나 전시회를 둘러싼 순수함, 자유 등의 개념을 해체하길 바랬고, 그 성역의 뒤에 도사리고 있는 정치적 경제적 주체들이 점점 더 미술의 생산과 수용에 강력하게 영향을 미치는 상황과 그들이 왜 미술을 지원하지는 지를 폭로해 왔다. 그는 미적 구조가 경제적 후원 주체와 깊은 관련을 맺고있다는 가정을 기반으로 세심한 조사를 통해 정보를 수집했는데, 대부분 미술계, 사회에서 주목되지 않았던 것들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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