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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3. 리뷰

[전시리뷰] 스페이스윌링앤딜링 PT&Critic 2013 Reunion(2015.12.22~2016.1.17)과 단상들

by ㅊㅈㅇ 2016. 1. 20.

PT & Critic 2013 Reunion 과 단상들


2013년 1월, 노은주의 개인전 <상황/희미하게 지탱하기>, 그리고 2월 김영민, 구민정의 <Drawing vs. Drawing>, 7월 한성우 개인전 <풍경-그림과 그리기>가 각각 열렸다. 그리고 2년의 시간이 2016년 1월, 이 넷의 리유니온(Reunion) 전시가 개최되었다. 스페이스윌링앤딜링의 PT&Critic 프로그램은 신진작가의 작품을 소개하고, 또한 작업 방향에 관해 토론할 수 있도록 기획되었고, 2년여의 시간이 흐른 지금의 시점에서 기존 프로그램 참여 작가들의 작품을 다시 한 번 전시한다는 것은 그들의 작업세계의 변화가 있었다면 무엇인지 혹은 기존 관심사의 깊이가 더해졌다면 그 또한 어떤 모습인지 지켜보기 위함이라는 생각이 든다.

노은주 작가는 사라지고 또 새롭게 구축되는 도시의 풍경을 화폭에 담아왔다. 낡은 건물들은 추억과 함께 허물어져 사라져 버리고, 그 자리에는 브랜드 이름이 붙은 깨끗한 새 아파트가 지어진다. 서울의 어떤 지역은 아직도 낡은 모습을 간직하고 있노라면, 이전의 자취를 찾으려야 찾을 수 없는 곳들 역시 많다. 작가는 그런 재건축 현장 풍경과 함께 톡하고 치면 와르르 무너져 버릴 듯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고 있는 임의의 구조물들을 삽입해 넣었다. 불안하고 음울한 기운이 물씬 풍겼던 이전 작업과는 달리, 이번 전시에서 선보인 작품은 도시의 소음들이 싹 제거된 듯 조용하다. 예전 작품이 재건축의 현장에서 굉음에 귀를 틀어막고 그림을 그린 듯 보였다면, 이번 신작은 그곳에서 주워온 잔여물들을 작업실에 앉아 마치 한 폭의 정물화를 그리듯이 제작한 듯 보인다. <풍경1>은 책상 위에 버려진 콘크리트 조각, 전등 갓, 종이 모형 등을 가지런히 올려놓고 그렸다. 각 사물들은 그 어떤 상징도 담고 있지 않은 듯 회색의 차가운 기운을 내뿜는다. 각각의 대상은 그 옆에 무엇이 놓여있는지 아랑곳하지 않은 채 각자 존재감을 과시한다. 실제 재건축의 현장과는 시간적, 물리적 거리감이 느껴지기는 하지만, 화면을 구성하는 조물주의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일지, 화가의 자의식이 더 명확해진 듯하다. <풍경_밤> <풍경_낮> 역시 나무판으로 만든 책상 위에 건물을 추상화한 형태의 종이 모형들을 그린 것이다. 밤과 낮이라는 시간은 검정색과 흰색으로 단순화했다. 도시에서의 삶과 주변 환경에 관한 노은주의 관심사는 연출된 상황에서 더욱 극화되어 나타난다.

한성우 작가는 2013년에 정갈한 풍경화를 그려왔다. 학교 캠퍼스 내의 건물의 일부, 옥상 냉각기, 온풍기 등 일상적으로 생활 속에서 볼 수 있는, 하지만 간과하고 넘어가기 쉬운 공간들을 그렸다. 두꺼운 터치, 톤다운 된 색깔은 쓸쓸하고 황량한 분위기를 풍긴다. 그의 캔버스 안에는 사람이나 어떤 생명체의 인기척이 없었다. 그가 그린 바닥은 살균 세척이라도 한 듯 바짝 말라 있었다. 널브러진 자재들로 한껏 혼잡해져 있는 <목공실 #1,2>에서부터 그의 정갈한 윤곽선들은 흐트러지기 시작한다. 자를 대고 그렸던 라인들은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으며, 흐르는 물감 역시 닦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뒀다. 한성우는 어느 날, 캔버스 위에 바른 흰색 물감의 평평함과 바닥에 떨어져 흩뿌려진 흰 물감의 흔적의 다른 양태를 보면서 그리기 행위에 관해 다시금 숙고해보는 시간을 가졌다고 한다. 그 사건이 계기가 되었던 것일까. 이번 전시에 출품한 작품 <장면> 시리즈에서는 모든 형상이 제거하고, 작가의 거친 숨소리와 붓질만을 가득 담았다. 화면에서 그가 구가하는 어법은 일견 1970-80년대 한국 앵포르멜 작품 몇몇을 떠올리게 한다. 오롯이 자신만의 화풍을 만들어내기 위한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작가 자신 안에 여러 종류의 다른 자아가 함께 존재하고 있음을 작가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삶과 작품이 일치하지 않는 다면 둘 중 하나는 거짓이라고 누군가 말했던가. 작가는 또 다른 자신에 관해 말하기 위해 예전에 보여줬던 모습과는 다른 새로운 길을 선택한 것이다.

구민정 작가는 책, 인터넷 등에서 찾은 이미지, 사진 등 다양한 이미지를 재배치하는 작업을 선보였다. 다른 각도로 이어진 벽의 선을 따라서 캔버스 위의 선들은 계속 이어져 나간다. 작가는 매번 설치 과정에서 주어진 공간과 함께 어우러져 3차원으로 확장되는 드로잉을 전시한다. 이번 전시에서도 구민정의 이미지들은 캔버스를 넘어 벽으로 뻗어나가며 자유롭게 증식된다. 이전과의 차이점으로는 색채의 활용이 더욱 활발해졌다는 점을 꼽을 수 있는데, 그래서일까 더욱 활동적인 느낌을 준다. 또한 레이스, 천, 스티커 등 촉각적 느낌을 주는 재료들을 함께 활용해 운동감을 더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한쪽 벽면에 하늘색의 스트라이프, 회색의 마름모 도형을 반복하여 배치하고, 그 위에 <Untitled>를 디스플레이 했다. 나는 큰 화면 안의 또 다른 화면처럼 보이도록 한 이 구성에서 포토샵에서 여러 이미지를 동시에 띄워놓고 새로운 그림을 만드는 장면을 떠올렸다. 연관성이 없는 듯 보이는 이미지가 여러 레이어로 쌓여서 예상하지 못한 그림을 만들어내는 모양새 말이다. 단단한 스트라이프와 흘러내리는 물감, 털 소재로 된 부직포까지 이 모든 요소들이 한데 모여 하나의 거대한 불협화음을 만들어내는 듯하다.

김영민 작가는 하얀 캔버스를 앞에 두고 느꼈던 불안감을 뒤로 하고 자신의 감정과 그때그때 떠올랐던 생각들을 자유롭게 기록했던 낙서를 모아 컴퓨터로 재현해 왔다. 낙서를 하나의 풍경으로 바라보고 일부는 지워내고 난 뒤, 그것을 컴퓨터에서 출력하여 전시한 것이다. 작가는 스스로 “이번 작업에서 이미지에 대한 의미 부여도 없고 ... 단순 유희에 지나지 않는 낙서의 행위 ... 그림을 그리는 작가의 즐거움, 그것의 무용성, 이미지를 보는 찰나의 관심. 이것들이 회화에 있어 내가 가진 전부”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럴듯한 이미지를 생산해내고, 그에 합당한 의미를 만들어 설명하고, 또 대중에게 선보이는 일련의 과정에 반기를 들 듯, 그는 지속적으로 아무것도 아님에 관해 말한다.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의 명대사 “나는 안하는 것을 선택했다(I would prefer not to)”를 떠올려 본다. 김영민 역시 바틀비처럼 그가 느끼는 회의감, 허무주의, 혹은 예술에 관한 단상들을 가볍게 표현하며 회화라는 신화를 해체하려 노력하는 듯 보인다. 문득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깊이에의 강요>도 떠오른다. 한 평론가에게서 “당신 작품에는 깊이가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깊이’를 더하기 위해 노력하던 여류화가가 결국 죽음을 택하는 이야기다. 회화라는 신화도, 깊이라는 환상도 분명 허상일 수 있지만, 부정의 전략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언어를 정교하게 다듬어 나가는 과정도 필요한 것은 아닐까.

기획자는 생산자인 동시에 매개자이다. 다시 말해, 작가와 작품이 존재하지 않으면 쓸모없어 지는 역할이다. 그만큼 가장 힘든 자리에서 홀로 힘겹게 자신과의 싸움을 감당해내고 있는 작가들이 고맙다. 그러나 결과물을 진지하게 감상하고 코멘트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점에서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하다. 나 역시도 작가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전시의 기획 방향이 다듬어 지기도 하고,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발전되기도 했다. 이번 전시를 통해 참여하는 모든 작가들이 또 다른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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