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bstract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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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의 탈영토화된 흐름의 추상화 -> 아이코닉한 캐릭터를 떠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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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즘적인 접근: 상품은 추상적인 교환 가치의 현현 (진짜같은 가짜)
테리 이글턴: 상품은 그것을 구성하는 물질 자체는 숨기고, 매혹적이고 아우라를 가진 물건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서 독특하고 감각적인 물건인체 한다.
막시즘은 항상 자본주의를 하나의 과정으로 분석한다. 자유가 보장되면서 동시에 파괴적인 과정. 사람과 물건을 봉건적인 사회적 과정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만들고, 그것을 교환가치라는 이름의 추상적 관계로 대체한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종류의 모던 아트는 그것이 무엇을 담고 있던지 상관없이 근본적으로 추상적인 특성을 갖는다. 이러한 추상적 교환의 체제 속에서 추상미술이 반영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Meyer Schapiro 는 미술에 있어서 추상이 이끌어진 것이 산업의 형태 혹은 현대 경제의 추상적 성격에서 발생되었다는 이론에는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다. 추상 미술은 산업적으로 발전된 국가 혹은 경제 중심 도시에서 발생하지 않았다. 게다가 많은 초기 추상미술 작가들은 현대 사회의 물질만능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을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이러한 진퇴양난을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으로 아도르노가 한 말을 떠올려볼 수 있다. 그는 추상미술이 예술 작품이 흡수한 가장 강력한 적인 - 교환가치 - 를 갖게하는 재현으로 부터 차단하기 위한 새로운 방법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작품과 같이 포스트-전통적인 세상에 어울리는 제스쳐를 드러내는 추상을 읽는 것은, 좀 더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사회적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추상적 구조를 가진 작업으로부터 도전 받기 시작하였다. 자본주의가 인식을 넘어서 스스로 추상화 될 때, 포스트 비쥬얼한, 개념적 단계로의 발전이 발생하였다. 형식주의적 추상의 연관성이 점차 더 의심스러워 지게 되었다. 만약 상품이 항상 가짜-구체적이고, 뼛속까지 추상적이라면, 적어도 이것은 물질적인 징후를 가지고 있었다.
1970년대에 보드리야르는 두개의 타워(세계무역센터)를 생산의 시대로부터 기호 현상의 시대로의 이행을 상징하는 것으로 사용했다. 자본은 이제 코드화된 정보로 전세계를 돌아다니게 되고, 궁극의 추상을 보여준다. 보드리야르의 이러한 더블 아이콘이 사라진 지금, 이러한 추상이 여전히 시각화될 수 있을까?
Abstract Art against Abstract Thought
피터 핼리는 추상화된 세계의 리얼리티를 담는 것이 추상 회화라고 언급하였다. 미술에 있어서의 추상은 20세기 사상을 지배한 추상화된 개념을 향해 나아가는 우주적 추동력의 현현인 것이다. 아도르노에게 있어서 현대미술은 관념에 저항하는 것이었다. 헤겔은 관념을 존재의 진실성으로 보았다. 이것은 스스로가 객관적으로 드러나보일 수 있는 법칙과 같았다. 아도르노는 존재가 관념에 포섭되는 것에 저항하고자 했고, 예술이 아도르노에게 특히 중요했던 것은 이것이 개념적으로 작동하지 않고, 잠재적으로 마술적 과정을 거치며, 그것의 새벽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모방하는 특성을 가진다. 예술은 관념적 지각을 교정한다. 그러나 만약 예술이 성공적이기 위해서는 이성의 추상적 부정을 끌어들여서는 안된다. 그 대신 이성의 성공을 상기시키면서 이성적 과정의 모방의 적용과 연관되어야 한다. 예술은, 다시 말해, 스스로에게서 등을 돌린 이성이다. 이것이 예술이 유사-언어적 특성을 가지는 이유이며, 예술작품은 해독할 코드를 상실한, 상형문자로 이루어진 글과 같다.
1917년 몬드리안은 자신의 에세이에서 ‘ 삶은 점점 더 추상적으로 되어가고 있다’고 썼지만, 그의 작업은 ‘완전히-추상적인 것과 자연적인것 혹은 구체적인-실제 사이’에 위치한다고 언급하였다. 또한 그의 작품은 추상적 사고만큼 추상적이지는 않으며, 손으로 만져지는 현실만큼 실제적이지는 않다고 언급하였다. 이것은 미학적으로 살아있는 조형적 재현이며, 반대에 위치한 것들이 그 반대로 변화하는 과정을 시각적으로 표현해낸 것이다. 추상 미술은 그러나 매우 보수적인데, 그것은 궁극적인 추상은 피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러한 개념적 예술은 추상적 사고 그 자체가 더욱 활발하게 작동하고 구체적이 되어가는 경제적 체제를 비추고 있다. 그 과정에서 언어는 강력한 추상의 표현수단으로 자리잡는다. 추상적 사고는 이제 사회적 생산에 있어서 기둥과 같은 핵심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1960년대 후반 솔 르윗은 개념은 곧 예술을 만드는 기계 라고 표현하였다. 추상적 사고는 그것이 다른 형태의 추상인 교환과 공모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아도르노가 이미 과학적 반영의 물신화에 반대하고 있음을 밝혔지만, 추상은 교환의 국제적인 이행에 자리를 잡았다. 생산자와 소비자의 관계 사이에서 교환의 추상적 연결고리들을 줄여나가게 되었다.
오래된 구조를 해독하기 위해서는, 경제적인 것과 개념적 추상이 함께 가는 것을 알수 있다. 이 두 가지가 자본주의보다 더 앞서 있음을 알 수 있고,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만이 교환 체제의 온전히 국제적인 이행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이다. 신이 주신 위계를 유동하는 자본의 구조로 변화하게 하고 전통적인 제약들에서 자유롭게 한다. 그 과정에서 개념적인 추상은 현대 과학의 이성으로 스스로 변모한다.
마르크스는 이미 종이나 금속으로 된 형태에서 자유로워진 돈이야 말로 점차 순수한 상징이 된다고 말한바 있다. 기술이나 정보가 하나의 코드화된 정보가 되고, 그것은 여러차례 팔리고 또 팔릴 수 있다. 라이센스를 획득한 소프트웨어처럼 말이다. 비물질화된 정보는 이제 전세계에 유통되고, 이러한 개념이 곧 통화가 된다. 개념적 자본주의의 하이퍼-추상화는 로고스가 감각적 경험을 이기는 상황과 같다. 이것이 추상 미술 남아 있는 것로서 구체적인가, 혹은 점차 쓸모없어질 것을 예고하는 것인가?
Abstraction, Concretely
회화의 끝이 성공적인 상품이 아니다. 그러나 페인팅이 물리적인 대상으로서 스스로의 가치를 위해 서 있는 대상임은 명백해 졌다. 이브 클렝의 1957년 밀라노 전시에서 그는 푸른 모노크롬을 선보여 각기 다른 가격에 제시하였다. 모노크롬은 형식주의적 실험에 있어서 그 끝에 있다고 할 수 있다. 1970년대에 들어서 페인팅은 점차 그 자체로 하나의 인스톨레이션이 되었고, 거대한 구조의 일부, 인테리어 디자인의 형식을 띠게 되었다.
포스트 페인털리한 디자인적 추상을 활용한 작가로 리암 길릭이 있다. 2005년 팔레드도쿄에서 개최한 전시 <동등한 경제를 창출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짧은 텍스트>에서 그는 실업자, 그리고 문을 닫은 공장이 이 공간을 포스트프로덕션이 공간으로 탈바꿈시키는 네러티브를 담고 있다. 그들은 이제 자동차가 아닌 아이디어를 만든다. 리암 길릭의 끊어진 알레고리의 파편들은 추상은 이제 이만큼 발전하여 더 이상 추상의 바깥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다. 추상이 구체적인 때에 거기에는 더이상 추상화할 무엇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이다. 만약 형식주의적 추상이 20세기 중반에 발전한 형태라면, 지금의 상황에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것이 아닌가?
빌렘 플루세르가 말한 것처럼 추상화하는 것은 빼는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는 물건에서 무엇인가를 빼는 것이다. 역사를 관통하여 볼 때, 추상은 대상에서 부터 멀어지고, 정보에 가까워지는 운동이었다. 플루세르는 이러한 움직임이 현재 정점을 찍고 있으며, 물건이 아닌 것들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 우리는 이미지로 가득한 세상을 살고 있으며, 코드화되어 있다는 점에서 포스트-이미지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추상화하는 것은 더 이상 물건에서부터 물건이 아닌 것을 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 대신, 추상에서 sache 을 빼는 것이다.
Sache 는 물리적인 오브제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관습의 대상을 의미하며, 사회적 동의, 반발을 의미한다. 목표는 구체적 사실을 추상화하는 것에 반대하는 데 있지 않은 대신, 추상의 편재를 실재화하는 데 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추상은 더 이상 순수하게 이상적이거나 개념적이지 않다. 이것은 사회적인 현실이다.고 말한다. 이것은 노동력과 모든 교환으로부터의 진짜 추상을 의미한다.
Inside Abstraction
SNS와 같이 사이버 스페이스에서의 네트워크는 현실보다 더 현실같은 세상을 구축해내는 데 성공하였다. 하룬 파로키의 <deep play>는 그래픽, 다이어그램을 활용하여 축구 게임을 추상화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구체적인 추상에 관해 숙고해볼 수 있는 좋은 예이다.
중요하게 부상한 툴 중 하나는 다이어그램이다. 1950-60년대 들어서 복잡한 사회적 기술적 시스템을 프로그램하고, 방향을 찾게 하기 위해서 다이어그램이 종종 사용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해킹당할 위험이 있었다. 한스 하케나 앨런 세큘라의 작업은 여러 측면에서 도식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한스 하케의 <샤폴스키 등의 맨하탄 부동산 소유실태, 1971년 5월 1일 당시의 체제>. 이 작품은 뉴욕의 로워 이스트 사이드 지역인 할렘을 대상으로 한다. 건물 사진과 텍스트를 담은 142개의 패널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패널에는 건물 정면의 사진, 주소, 건물 소유주의 이름과 구입날짜가 기록돼 있다. 이 작품을 통해 하케는 샤폴스키 가족이 부동산을 독점하고 있음을 폭로한다. 사회 정치적 진상조사를 사진적 이미지로서 저널리즘의 방식으로 재정립하는 것이다. 당시 샤폴스키 그룹이 구겐하임 미술관의 주요 후원자였기 때문에 관장이 사전에 전시를 개최하는 것을 취소하였다.
피터 핼리는 모더니스트적 추상 미술에서 선과 도형이 승화될 수 있는 욕구를 빼앗았고, 그것들을 우리 사회에서 코드화된 상징으로 읽으려고 하였다. 추상은 이제 일상이며, 현실의 재현이라는 뜻이었다. 그의 작품은 명백하게 다이어그램처럼 보였고, 하이퍼-자본주의적 사회 전체를 지시하였다. 그의 작품은 동시에 시장에서 인기가 좋은 명품 작업이기도 했는데, 그것은 핼리가 가진 기본적 개념의 순열(permutation)이었다. 또한 그의 작업은 완성되지 않은 상태인 것이 강조되었는데, 월페이퍼와 함께 현실적으로 움직이며 만들어지는 차트로서 기능하였다.
1990년대에 들어서 작가들은 핼리가 다이어그램을 해석한 방식을 거부하기 시작했고, 더 구체적인 네트워크와 구조를 활용하기 시작하였다. Mark Lombardi 와 Bureau d’etudes 가 그 예시이다. 이러한 다이어그램 작업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이같은 작업이 매우 압도적이고 즉각적인 효과를 가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지나치게 나이브한 것이라는 점이다.
왈리드 라앋 Walid Raad 은 동시대 정치적, 경제적 체제에 관해 폭로하는 행동들은 매우 그 효과가 미미해보일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추상화하는 것은 하나의 차원을 만드는 것이다. 각기 다르고 연관이 없는 것 같은 것들을 여러가지 가능한 관계망 안으로 끌어들이는 일이다. 추상화하는 것은 본질의 실체를 표현하는 것이며, 그것의 가능성들을 알리는 것이다. 무한한 관계성에서 관계를 끌어내는 일이며, 여러가지를 드러내보이는 일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단순히 보이는 관계를 시각화하지 않고, 일반적으로 동떨어져있다고 생각하는 대상의 관계들을 현실화한다. 그리고 네오 봉건적 위계를 무너뜨리고현재 존재하는 추상 속에 실제로 존재하는 불평등을 부숴야 한다. 예를 들어, 각기 다른 종류의 이민자, 상품 등에 적용되는 각기 다른 법칙 들을 떠올려 볼 수 있다.
예술 작품의 위상은 - 다른 상품들과는 달리 아우라를 가지고 있는 - 조심스럽고 온전하게 지켜진다. 블루칩 작가의 작품들이 럭셔리한 요트와 마찬가지로 비싼 가격에 팔린다. 그러나 그것들은 다른 명품 제품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Bereaud’etudes의 작업은 이러한 맥락에 매우 전략적으로 접근한다. 그들의 다이어그램을 이용한 조사를 지속하지만, 싸고 많이 반복되어 생산될 수 있는 방식으로 제작하여 시장에서의 변두리에 스스로를 위치시킨다. 경제적 투기가 전혀 불가능한 위치말이다. 그러나 예술과의 중요한 관계는 궁핍화에 다다르게 하는데, 그것은 미학적이면서 동시에 정치적이다. 구체적인 추상의 체제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반영하고 있는 유일한 상품으로서 예술작품은 하나의 모범적인 상품이 될 수 있다. Abstraction은 더 이상 내부의 용감한 탐험가들이 보아야하는 외부의 세계가 아니다. 우리는 abstraction의 토박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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