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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7. 번역, 요약

David Joselit, After Art, 2012

by ㅊㅈㅇ 2019. 4. 18.

Image explosion

아트페어에서도 보면 이제 예술은 국경의 제약없이 통용되는 통화international currency가 되었다. 예술과 같은 통화의 미학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먼저 우리는 재료의 개념을 버려야 한다. 이 책의 목표는 예술의 정의를 확장하여 관계, 링크의 이질적인 구성을 끌어안는 것이다. 미디엄이나 포스트미디엄은 다양한 형태의 currencies를 설명하기에는 좋은 툴이 아니다.   

첫번째 과제는 예술이 어떤 종류의 currency인지 아는 것. 예술의 유통에 있어서 두개의 주요한 위치가 있는데, 이것들은 국제 정치의 구조와 연관되어 있다. 하나는 아트 바젤, 또 하나는 큰 서양 미술관의 우세 이다. 신자유주의적 이미지 순환 구조에서는 열린 시장의 형태가 있고 예술이 통화의 형태로 존재한다. 두번째 태도는 근본주의적 태도라고 설명가능한데, 예술과 건축은 특정한 한 장소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이다. 종교적 근본주의의 태도와 비슷한데, 파르테논의 조각이 브리티시뮤지엄에 판매되었던 1816년, 이 작품이 원래 있던 장소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신자유주의와 근본주의 사이의 거대한 정치적 conflict 가 있어왔다는 것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예술에는 외교적인 포트폴리오가 있다. 예술은 새로운 공공 장소를 만드는 데 참여하기도 하고, 해외로 수출가능한 시장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1979년부터 중국의 컨템포러리 아트는 국내의 정치적 상황이 점차 자유화되면서 흥망성쇠를 같이한다. 아이웨이웨이는 인터넷에 적응하여 그의 블로그에 중국 내의 문제적 상황에 관해 적기도 했다. 2008년 스촨 지진으로 수많은 학생들의 죽음에 관해서 적었다.

1989년 톈안먼사건 이후 중국의 민주화운동이 가속화되었으며, 예술가들은 국가와 새로운 더 자율적인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독립적 태도를 가진 이들이 지불해야할 대가는 경제적인 불안함, 고용거부 였다. 아이웨이웨이의 국제적인 명성은 중국 정부를 압박하여 그를 풀어주도록 했다. 만약 예술이 21세기에 정치적 영향력을 갖는다면, 그것은 문화적 외교의 능력에 있을 것이다.  

문화적 유산의 반환 문제에 관한 토론에 있어서 2000년대 초반에 매우 다른 종류의 외교적 딜레마를 낳았다. 물론 동시대미술 작품 반환을 요구한적은 업었지만, 문화재반환의 이슈는 신자유주의 모델의 자유 순환, 유통의 구조와 근본주의적 태도 사이에서 논란을 일으켰다.

개념주의 미술과 같이 “국제적인 스타일”을 가진 미술이 1960년대부터 유행하였고, 이제 동시대의 문화적 유산에 관한 윤리는 전적으로 정보에 달려있게 되었다. 1970년 유네스코에서는 문화재의 불법적인 수입과 수출을 막기 위해 정책을 제시하였는데, 유네스코에서 미적 가치보다 정보적인 가치를 더 강조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것의 집행 역시 정보의 두번째 장르에 의존하고 있었다. 대상의 역사가 충실하게 기록된 - 보호 관리권의 지속적인 역사를 담은, 기원, 출처, 유래 말이다.

미국의 게티 뮤지엄에서도 그리스의 문화 유산을 반환할 것에 관해 법적인 논쟁이 있었다. 문화적 유산이 장소와 시간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경우,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딜레마에 봉착하게 된다. 이미지는 통화와 같이 시장이 그것을 이끄는 대로 자유롭게 움직여야할까? 혹은 근본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문화정 정체성의 가치를 지키기 위하여 그 자유를 제한하여야 할까?

문화재 반환의 문제는 문화재 유통에 있어서 세 가지 중요한 패러다임을 제시하는데, 하나는 the migrant  이주자, the native 토박이, the documented object 기록된 물체이다. 이주하는 오브제는 갤러리, 컬렉터, 미술관 등을 옮겨다닌다. 그것의 문화적 가치는 미적 파워에 있지만, 법적으로는 누군가의 소유물이다. 이주하는 오브제의 정보는 그것의 형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지, 그것의 기원이 되는 장소와는 연관이 없다. 그것의 소유권은 문화적 공통성이나 특별한 지식에 의존하지 않는 대신 순수한 공감에 있다. 결과적으로 원래 장소와의 연관관계가 끊어져야만 자유로운 시장에 진입할 수 있게 됐다.

Native object는 근본적으로 특정 장소에 속해 있다. 이것이 미적 질이 가장 뛰어나다고 할지라도 그것의 중요한 가치는 구체적인 문화적 정체성에 종속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들은 장소특정적인 특성이 강하다. 장소가 옮겨지는 순간 이것은 불구가 되는 것이며, 의미가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Documented object는 원래 장소와의 관계가 잘 연구가 되어서, 정보적 다큐멘터리적 가치를 생산하는 것이다. 이것은 원래 장소에서 멀어지거나, 먼 지역에 컬렉션이 된다고 하여도 여전히 문화적 자산의 일부로 남는다. 모든 가치는 경제적 접근 구조에서 비롯되며, 가치가 축적되는 것은 어던 방식으로든 누군가에게 소유될 때에 발생된다.

이미지는 돈과 같은 경제적 가치에 순응하지 않는 통화의 형태가 될지도 모른다. 정보의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에, 기록은 예술의 창작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동시대 예술작품은 대부분 이 documented object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발터 벤야민 -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텔레비전, 인터넷, 스마트폰 등과 같은 미디어로 촉발된 이미지 생산과 유통에 있어서의 혁명적 전환은 다루고 있지 못하다. 1930년대 중반에 나온 책이다보니.. 경제적-미적 시대가 변화하고 있다. 이제는 하나의 이미지가 아니라 숫자를 제한할 수 없이 수많은 이미지의 복제가 이뤄지는 시대이다. 이제는 더 이상 벤야민이 말하는 아우라가 사라졌음에 노스탤직하게 절망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벤야민에 따르면, 아우라는 장소 특정성에서 기인한다.   아우라는 이미지 근본주의와 밀접한 연관관계를 가지고 있다. 산업화 현대화가 리우러지면서 이미지는 특정한 장소에서 떨어져나와 유통되기 시작했다. 이미지는 더 이상 장소특정적일 수 없을 것이다.

하나의 작품에서 populations of images로 옮겨가면서 잃은 것도 있고 얻는 것도 있다. 벤야민에 따르면 정체성의 상품화, 원본성 역사성의 상실은 기술적인 복제가 가능해지면서 생겨난 문제라고 종종 언급된다. 그러나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다. 날것의 물질은 대량 유통된다고 해서 절대 고갈되지 않는다. 그 반대로, 대량 유통은 민족성을 더욱 강화하는 기재가 된다. 더 많은 공급은, 다른 말로, 더 많은 수요가 있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대량 공급을 통한 Saturation 포화 는 한 장소에 종속되어 있지 않고 동시에 모든 장소에 있는 상태를 말한다. 이미지를 통해서 가치를 생산하는 것이다. 아우라가 있는 곳에는 buzz 웅성거림이 있다. 여러 마리의 벌떼가 모여있는 것처럼 이미지의 떼는 웅성거림을 낳는다. 이것은 마치 새로운 아이디어나 트렌드 유행이다. 하나의 이미지가 포화 상태를 겪게 되면, 이것은 웅성거림을 얻게 된다. 웅성거림은 하나의 오브제에서 발생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개체들의 신생 움직임에서 발생된다. 이것은 하나의 거대한 지식에 의해 계획된 것이 아니라, 분배되어 있는 개인의 작 은 움직임들이 특별한 의도를 갖지 않고 있는 상태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서양에서 가장 먼저 관심을 받은 작가를 예로 들어보자. 시니컬한 이성과 폴리티컬 팝을 제작한다고 불리는 왕광이의 작업은 20세기의 중국의 정치인 모티프를 담고 있다. 글로벌 아트 월드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중국스러움을 담은 이미지가 유리했다. 그의 작품은 그러나 익숙한 서양식의 예술 양식을 사용하여 중국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거부감없이 다가갈 수 있도록 ‘이국적’ 도상들을 잘 다듬었다.

미술관 지하실에 더 많은 작품을 축적하지 않는 대신, 우리는 어떻게 예술이 돈과 같이 화폐화되지 않고, 통화 currency 로서 기능할 수 있는지 탐색한다. 나는 우리가 이미지 유통에 관해 더 민주적으로 생각하길 촉구한다. 그리고 이미지 부의 재 분배가 어떤 형태가 될지 생각해보고, 또 단순히 경제적인 이익을 위한 목적 이외에 예술의 통화 가치를 어떻게 사용해볼 수 있을지 고민해보았으면 한다.

 

Populations

1990년대부터 건축에서의 논의는 컴퓨터가 있었기에 가능한 생물학적 은유를 새로운 형태로 이론화하는 데 기여해 왔다. Biomorphic 생물 형태의 blob 한방울 부분. 파라메트리시즘은 하나의 성숙된 스타일이다. 컨셉, 컴퓨터 테크닉, 형식적 레퍼토리, 그리고 구조상의 로직 은 이것을 하나의 단단하고 새로운 헤게모닉한 건축의 패러다임으로 확고히 한다. 콜라주는 figure 전경 ground 배경 의 관계를 혼란하게 하지만, folding 접는 것 은 하나의 연속된 표면에서의 어떤 분열을 의미하는 정도이다.

중력에 맞서기 위해 여러 종류의 구성물들이 잘 어우러져 있는 대신에, 위 사진에서 볼 수 있는 구조는 일종의 intensification의 그라데이션을 보여준다. 더 빡빡하게 모여있는 곳과 덜 그런 곳으로 이루어진 구조이다.

24장의 똑같은 로맨틱한 해변의 사진을 담은 포스트카드를, 개별 프레임을 한 뒤에 그리드의 형태로 인스톨했다. 관객은 하나의 이미지를 볼 때 동시에 23장의 복사본을 함께 마주하게 된다. 만약 당신이 아주 천천히 움직이면서 그것을 바라본다면, 역설적인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그 경험은 어떤 것이냐하면, 같으면서도 또 구별이 되는 그런 경험 말이다. 공간적으로 그리고 시간적으로 다른 것들과 구별이 된다.

Reiser+umemoto는 figure-ground의 구별은, 건축에서 구조와 그안을 채우는 것들과 같다. 그들의 군집 안에서 포스트카드는 figure 이자 동시에 ground 의 역할을 한다. 같은 이미지를 여러번 재방문하거나 몇 분뒤에 몇 센치 옆에서 보는 것은 절대로 똑같은 경험이 아니다. 이것은 ground에 반해서 생기는 일이다. 관객은 두 방향으로 동시에 밀쳐지는데, 하나는 한장의 포스트 카드를 보도록 하는 것과, 예술작품에 내재한 논리의  복잡한 구조를 따라가도록 하는 것이다. 미니멀리스트의 조각처럼 레빈의 작업은 보는 사람이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가면서 조절하도록 한다.

레빈의 재생산과 반복의 전략은 개개별 작품에 대한 강조에서 populations of images 이미지 군집을 분열시키거나 조작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미 존재하는 컨텐츠에서 선택하고 리프레이밍하는 방식을 통해서였다. 포스트카드 콜라주 작업은 무엇이 재현되었는지가 점차 덜 중요해진 것이 된 상황을 보여주었다. 이는 별개의 이미지들 사이의 관계/네트워크를 강조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하룬 파로키의 Immersion 2009. 비디오 게임 테크놀로지가 미국 군인에게 치료의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리서치는 어떤 장소나 상황의 숨겨진 구조를 드러내는 데 사용하거나, 혹은 제도 비판의 맥락에서 활용된다.각각의 전략들은 컨텐트의 상황 혹은 퍼포머티브한 성격을 조작하고 조종하는 데 적합하다. 새로운 컨텐트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종류의 미술을 대할 때에는, 의미를 도출해내는 것이 충분하지 않다. 레빈의 포스트카드 콜라주의 경우, 이 작업은 두가지의 적절하지 못한 이해방식으로 우리를 이끈다. 1. 이 작업이 실제로 ‘seascape’에 관한 작업이라고 논쟁하는 것 2. 덜 바보같기는 하지만 여전히 틀린 결론인 이 작업이 기술적인 재생산에 ‘관한’ 작업이라고 보는 것.

중요한 것은 작업의 힘은 어디에서 나오느냐하면, 하나의 싱글 이미지와 네트워크 오브 이미지를 동시에 한번에 보여줌으로써 performative 모드를 staging 한다는 데 있다. 다른 말로 하면 레빈의 작업은 내레이션을 필요로 한다. 이것이 매우 다른 종류의 작업처럼 보이는 매튜 바니의 작품과 레빈을 연결해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그 둘 작업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이미지의 사회적 삶을 이야기하는 과정 때문이다.

매튜 바니의 크리매스터 사이클에서 오브제는 주인공처럼 기능한다. 바니의 개인적인 ‘만달리’는 혹은 다이어그램은 그가 스스로 개발한 자신의 로고로 코드화되어 있다. field emblem 은  타원형의 원 위에 직각의 선이 그려져 있는 형태로 되어 있다. 작가의 시스템에 의하면, 이 단순한 형태는 3개의 역학관계를 드러낸다. 1. 방향 설정 없이 raw drive 2. 음식을 먹어서 소화하거나 운동을 할때 근육조직이 만들어지는 생물학적인 움직임 3. 항문에서 나오는 것과 작가가 연계해서 무언가를 만드는 것. 바니의 작업에서 생산은 막혀있는데, 그것은 시스템 내의 에너지를 유지하기 위해 계속해서 반복되는 막힌 회로 구조를 갖는 것이다. 필름이든 퍼포먼스, 붕괴되었는, 소화되었든, 그의 작업은 field emblem 을 순열로 만든 구조들의 반복이다. 다른 말로 하면, 바니의 내러티브는 changes in format 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바니는 삶을 여러가지의 드라마로 도해한다. The field emblem은 작품의 의미가 아니라 그것의 format 이다.

건축과 예술에 있어서 object-base 의 미학에서 network aesthetic 으로 변화하게 되었고, 이것은 populations of images 가 출현하면서 그렇게 된 것이다. 컨템포러리 아트에 있어서 미술사적 해석의 우세는 지속적으로-오브제는 근본적인 해석의 유닛이라는 사실을 추정하는 것에서- 떠나고 있다. 개념미술 이후에 예술작품이 인습에 얽매이지 않고 일시적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나는 이러한 전략을 cnetripetal 구심적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왜냐하면 그들은 의미를 대상의 안쪽으로 들어가는 방식으로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Meaning lies behind the object : 도상학적 해석이 가능한 것. 문화적 의미를 가지고 있고 그것은 해석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Meaning lies beside the object : 사회적 측면의 미술사 이해. 젠더나 섹슈얼리티. 그리젤다 폴록이나 TJ클락같은 사람들이 이러한 방식의 선구자이다. 사회 안에서의 미술사 역시 작품에 의미가 붙어있거나 그 근처에 있다. 역사가는 예술작품을 그것의 역사의 컨텍스트와 연결해서 보기를 원한다.

Meaning lies within the object: 구조주의, 포스트구조주의적 예술사 접근방식으로, 로잘린드 크라우스나 이브알랭 브아의 경우가 대표적. 예술작품의 중요성은 기호적 논리에 결부되어 있다고 믿는다. 예술작품의 가치는 그것이 가진 내재적 구조에 있으며, 비평의 역할을 그 내부 구조를 바깥으로 끄집어내서 설명하는 것.

Meaning lies before the object : 유토피아의 아방가르드 전통이 여기에 적용될 수 있다. 예술작품은 앞으로 다가올 이상적인 미래에 관해서 예언한다. 20세기 초반의 러시아구축주의나 데스 등.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의 Utopia Station 프로젝트 2003 베니스비엔날레 - 이 프로젝트에서 큐레이터들은 중요한 사회적 변화를 만드는데 trigger할 수 있다고 믿음

이러한 방법론은 centripetal 구심적이다. 왜냐하면 그 의미가 오브제의 안쪽에서 생성되는 것이기 때문.. 의미를 만드는 것은 오직 예술작품의 가격을 - 지식의 currency,로서 부여하는 방식으로, 컬렉터가 구입할 수 있는 상품이 될 뿐이다.

르 코르뷔지에의 architectural promenade의 개념에서 그는, centrifugal 원심의 VS. centripetal 구심의 해석을 구분할 것을 제안한다. 르 코르뷔지에의 Maisons La Roche에 관한 설명을 보자. 두 개의 집은 하나의 형태로 연결되어 있는데, 2가지의 문제점을 가진다. 1. 아이가 있는 가족의 경우 여러개의 작은 방이 있고, 가족의 메커니즘을 구성하는 데 유용하다.  다른 집은 미혼남자를 위한 것으로, 예술에 대해 열정적이며 현대미술 컬렉션을 보유하고 있다. 이 두번째 집이 좀 더 건축적 산책의 형태에 더 가깝다. 들어가게 되면, 건축적 스펙터클이 한눈에 들어온다. 여러 방식으로 돌아다닐 수 있고, 바라보는 관점 역시 매우 다양할 수 있다. 빛이 들어오는 방식도 여러가지로, 큰 창문은 바깥 풍경을 보여주면서 건축적 통일성을 재주장한다.

Architectural promenade는 움직임을 통해서 지속적인 시각의 변화를 부여하는 형태이다.

Centrifugal 한 접근은 centripetal 한 의미 구성체계와는 매우 다르다고 할 수 있다. 후자는 오브제의 안쪽에서 그 의미를 강화하도록 구성되었다면 전자는 그 반대다. 르코르뷔지에의 유산은 바깥을 바라보게 하는 물리적인 경험 +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의 “lines of flight 탈주의 비상선” 을 연결짓는다. 이 탈주선 개념은 인간존재의 새로운 방식을 창조하기 위해 억압적 담론 제도를 탈영토화한다. 이 과정은 무의식, 신체의 역동적이고 생산적인 리비도적 에너지를 제한하는 담론과 제도를 해체한다.

내 생각에 피에르 위그의 작업이 르코르뷔지에의 unfolding 모델과 닮아있는 듯하다. 그가 자신의 작업을 dynamic chain that passes through different formats 라고 말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필름은 공공의 장소이다. 이것은 기념비가 아니고, 대화와 행동의 장소이다. 이러한 발언에서 위그가 여러 이미지를 모아놓은 형태의 필름 작업이 공공의 장소처럼 기능하기를 원함을 알 수 있다. 공공의 장소라 함은, 닫혀있는 의미 체계가 아니라, 바깥으로 뻗어나가는 힘을 가진 작업이라는 의미이다.

미국에서 집을 소유하고 있다면 그곳에서 파티를 여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지하실에서 마약을 제조하는 것은 문제가 된다. 누군가는 초원에서 소를 방목할 권리를 갖고, 누군가는 나무를 모을 수 있는 권리만을 갖는다.  피에르 위그의 the third memory 는 재현의 권한을 유사한 방식으로 드러낸다. 하나의 이벤트의 진실성에 관해 다르게 주장하는 여러 이미지들을 겹쳐놓는 방식으로 말이다.

형태에 공간적 혹은 centrifugal 바깥으로 나아가는 힘을 부여하는 방식 중 하나는 르 코르뷔지에와 마찬가지로 일종의 이미지 산책 promenade 를 만드는 것이다. 관객의 위치 변화에 따라서 이미지의 원자가 valence 가 변화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레빈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계속 움직이면서 같은 이미지를 여러 차례 보게하고,  바니는 그의 field emblem을 여러가지 악한을 소재로한 picaresque 모험에 접목시키고, 위그는 하나의 이벤트에 다양한 rights to representation 을 병치시킴으로써 비슷한 목적을 달성한다.

또 다른 최근 방식은 유사-건축적인 특성을 가진다. 이것은 실제 열린 플랫폼 위에 만들어지고, 건축적 구조에 구체적인 레퍼런스를 두고 있다. 실제 어떤 일들을 벌리는 것부터, 가상 이벤트를 만드는 것까지 다양하다. 리크리트 티라와니트의 Secession(분리독립) 2002 가 좋은 예이다. 목요일에는 24시간동안 전시장 문을 열고, 필름 스크리닝, Dj잉, 섬머 바베큐 등을 했다. 종종 타이 마사지를 제공하기도 했다고. 이러한 행위들은 미술관을 땅과 건물의 유일한 소유주로서의 역할을 가졌던 것과는 멀어지고, 관객이 일종의 shareholder 주주 처럼 역할하게 되는 방식으로 변화하게 된다. Secession 분리독립 은 commons 공유지 의 동시대적 버전으로 새롭게 고안된 것이다.

위그, 티라와니트 등이 구상한 공유지의 이미지는 format a set of links 하고 있다. 사람, 이미지, 공간, 이벤트 등을 이용해 어떤 종류의 연결고리를 만들고 링크를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constellation of links 를 나는 formats 이라고 부른다. 쉽게 설명해서 포맷은 컨텐츠를 전달하게 되는 이질적이고 임시적인 구조 인 셈이다. Medium 은 포맷의 subset 부분집합이다. 차이는 오직 스케일과 유연성에 있다. 미디엄은 제한적인데 그 이유는 단일한 오브제와 제한된 시각적 실천들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미디엄은 현재와 같은 디지털 세계에서는 아날로그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포맷은 이미지의 currency, 파워를 조정할 수 있는데, 그것의 힘, 속도, 명확도를 조절함으로써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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