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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7. 번역, 요약

David Joselit, Painting Beside Itself, 2009

by ㅊㅈㅇ 2019. 7. 26.

Jutta Koether, <Hot Rod (After Poussin)>, 2009 

한 인터뷰에서 워홀은 이렇게 말했다. "그냥 벽에다 페인팅을 거는 것은 끔찍하고, 전체 네트워크가 중요한 것이다! 예술을 말할 때 모든 것은 네트워크에 속해있다. 바작, 건축물, 벽의 색 등등" 키펜베르거는 이런 질문을 하기도 했다. "페인팅이 어떻게 네트워크와 연결이 되는가?" 페인팅은 항상 유통되어 왔고, 전시되는 등 네트워크에 항상 속해 있었다. 키펜베르거는 단순히 그런 의미에서의 네트워크를 넘어서서, 하나의 개별 페인팅이 이 같은 네트워크를 시각화할 수 있는지 고민했다. 그의 스튜디오에서 일하는 어시스턴트나 동료들(Michael Krebber, Merlin Carpenter, Jutta Koether) 은 비슷한 고민을 공유하고 있었다.

유타 쿼터(Jutta Koether)의 2009년 개인전 <럭스 인테리어(Lux Interior)>(리나 스펄링스 갤러리 Reena Spaulings Gallery in NY)에서 한 점의 페인팅은 퍼포먼스, 인스톨레이션, 캔버스를 잇는 구심점처럼 기능했다. 전시는 이 한 점의 작품에 집중되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작품은 한쪽 다리는 갤러리 안에, 한쪽 다리는 갤러리 밖에 놓인 스크린과 같은 벽 위에 설치되었다쿼터의 <개조한 자동차(Hot Rod)>(2009)는 니콜라 푸생(Nicolas Poussin)의 <피라무스와 티스베가 있는 풍경(Landscape with Pyramus and Thisbe)>(1651)에서 시작되어 모노크래마틱한 버전으로 재창조된 작업으로, 피와 화의 색깔인 붉은 색으로 모티프를 강조하였다. 이 작품 앞에서 작가는 3개의 렉처 퍼포먼스를 진행했고, 점멸등이 꺼졌다 켜지기를 반복해서 마지 대화상대 앞에 서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했다

이 전시는 나의 질문 "어떻게 페인팅이 네트워크에 속할 수 있는가?" 에 관한 답을 주었다. 네크워크를 시각화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이해할 수 없는 정도의 스케일(작은 마이크로칩부터 글로벌 인터넷 네트워크까지)인데다, 동시대적 숭고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구글 인터넷 지도를 켜면 정보를 발견할 수 있고, 디지털 월드에서 별을 관측하는 오랜 전통을 연관짓는다. 쾨터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는데, 전체 네트워크의 윤곽을 묘사하지 않는 대신, 네트워크 안에 있는 대상의 행동을 보여준다. 나는 이것을 그들의 이행성(transiticity)이라 부르고 싶다. '타동사의(transitive)'라는 단어는 사전적으로는 어떤 물질에 특정한 행동을 표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네트워크 안에 있는 물체의 상태를 캡춰하는데 더 좋은 단어는 없다고 생각한다. 장소에서 장소로 순환하는 것, 새로운 문맥에서 해석되는 것, 이러한 통로(passage)의 개념을 담고 있는 것이다.

쾨터가 이 전시에서 보여주는 이행성은 두 축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푸생의 작업을 재연하여 시간의 흐름을 보여준다는 것, 또 다른 축은 페인팅을 그것을 둘러싼 사회적 네트워크의 구심점으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Hot Rod>의 행동(behavior)는 하나의 명사, 인격체(personage)가 되는데, 스테이지 위에 서있는 점, 디스코 램프를 사용한 점, 작가가 직접 진행한 세 번의 렉쳐 퍼포먼스 등에서 발견된다. transitive한 페인팅을 만드는 것은 캔버스 안으로의 길과 바깥으로의 길을 보류/연기(suspension)하며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능력을 가짐으로써, 페인팅은 모더니스트적인 부정의 덫(trap of negation)에 갇히지 않고, 제도비판(institutional critique)로 기능할 수 있다.

Stephen Prina, <Exquisite Corpse: The Complete Paintings of. Manet>, 41 of 556, Nymphe Surprise (The Startled Nymph), 1861, Nasjonalgalleriet, Oslo 1988

 

이런 관점에서 스테판 프리나(Stephen Prina)는 키펜베르거와 유사한 포지션을 취하고 있다. 프리나는 1988년 계속 진행되는 프로젝트인 <아름다운 시체: 마네의 페인팅들(Exquisite Corpse: The Complete Paintings of Manet)> 시리즈를 시작했다. 이것은 에두아르 마네의 556점의 인덱스를 리소그래프로 찍어낸 작업이었다. 이것은 프리나가 제작한 세피아 잉크 모노크롬 드로잉 옆에 전시되었고, 이는 실제 마네의 작품 사이즈와 포맷과 동일했다. 그냥 보기에는 빈 것처럼 보이는 드로잉이지만, 프리나는 이렇게 말했다. "표현의 정도로 보자면 매우 low할지도 모르지만, 표면은 묽게 희석된 세피아 잉크로 적셔졌다. 몇몇은 이것을 빈 이미지라고 보지만, 그것들은 비어있지 않다. 끝에서 끝까지 피그먼트가 있고, 핸드메이드로 가득차있다."

쿼터에게 페인팅은 퍼포먼스와 인스톨레이션의 구심점이되지만, 프리나에게 페인팅은 작가의 작품을 교차하는 지점이자, 대상의 크기, 비재현적 스타일의 재연이다. <아름다운 시체><Lux Interior>와 매우 다르지만, 이 둘은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페인팅에서 나타나는 이행적인 행위를 시각화하여 사회적 네트워크와 연결시킨다는 점이다(to visualize the transitive passage of action from a painting out to a social network). 프리나가 프로젝트 제목을 <아름다운 시체>로 지은 이유는, 그의 작업과 나를 비교하기 위해서는 작품의 완전한 몸체를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Cheyney Thompson, <Robert Macaire Chromachromes>, Andrew Kreps Gallery, New York May 2 - July 4, 2009

최근에는 3명의 작가 작업에서 발견할 수 있다.

체이니 톰슨(Cheyney Thompson)<Robert Macaire Chromachromes>(Andrew Kreps Gallery). 체이니 톰슨은 페인팅의 포맷(diptych 두폭 제단화, the edge, the tondo 원형 그림)의 목록(inventory)를 보여주었다. 손으로 직접 상호보완적인 색 조합을 만들어 올오버 필드로 패턴을 옵티컬하게 채워넣었다.

웨이드 가이튼(Wade Guyton)Friedrich Petzel에서 열린 전시는 레디메이드 컴퓨터 포맷을 제작하기도 했다. 포토샵을 이용해서 검정 모노크롬을 제작하고, 잉크젯 프린터로 출력한 것. 가이튼은 갤러리의 바닥을 검은색으로 일시적으로 칠해 DIY 디지털 미학을 신체적으로도 느낄 수 있도록 했다.

레베카 쿠웨이트만(RH Quaytman)2008년 레아 아나스타스(Rhea Anastas)와 에이미 실먼(Amy Sillman)와 협업하여 전시 <From One O to the Other>를 선보였다. 그녀가 그린 모티프들은 로워 이스트 사이드에 있는 갤러리 사진에서 모티프를 가져온 것이었다. 옵티컬한 패턴을 실크스크린하여, 그 안에 잠겨 있는 모티프에 집중하기 어렵도록 만들었다.

이 세 전시는 현대회화의 레토릭(rhetoric 올오버 필드, 모노크롬, 옵아트)를 이용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사회적 네트워크와 봉합하도록 하였다. 단순히 개인의 사고에 현상학적 관계 속에 놓은 것이 아니다. 체이니 톰슨은 옵티컬한 센세이션이 페인팅의 전통적 포맷의 역사와 연결되도록 하였고, 가이튼은 디지털 인포메이션과의 돌연변이를 만들었고, 쿠에이트만은 로워 이스트 사이드의 작가와 갤러리 등 젠트리피케이션의 유산에 관한 도덕적 태도를 암시하였다.

이와 같은 세가지의 이행적인 실천들(practice)은 통화(currency)를 얻었는데 왜냐하면, 비평적으로 막다른 길(dead end)이라고 생각한 지점에서 탈출구를 찾아냈기 때문이다. 예술 중에서도 가장 쉽게 컬렉트 할 수 있는 종류의 작품이 회화이기 때문에, 페인팅은 항상 가장 쉬운 상품화로 비난받아 왔다.

구체화, 실체화, 사물화(reification) 라는 단어의 문제는 하나의 네트워크 안에서 대상의 순환이 영구적으로 체포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멈춰져서, 대가를 지불하게 되고, 벽에 걸려서, 창고에 보관되고, 특정한 사회적 관계에서 영원히 결정 (crystalize)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transitive painting 은 하나의 네트워크에 대상이 진입할 수 있도록 하는 형태(form)과 구조(structure)를 발명해내는 것이며, 완전히 멈춰있을 수 없다. 계속해서 다른 물질로의 변화를 꾀하며 각기 다른 순환의 속도를 가진다. 지질학적으로 아주 느린 속도에서부터 무한하게 빠른 속도까지. 푸생은 쿼터의 손 위에 서게 되고, 프리나는 마네의 전체 작품을 꼭 붙잡는다(seize).

transitivityform of translation이다. 이것이 네트워크에 진입하게 될 때, 페인팅의 body무한한 탈구/전위 (dislocation), 분열/파쇄(fragmentation), 비하/저하/약화(degradation)에 제출(submit)된다. 키펜베르거가 20년 전에 말했던 것처럼, framing condition 격리(quarantine)될 수 없다.

페인팅은 자기 자신 옆에 있다(Painting is beside it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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