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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7. 번역, 요약

MMCA 박수근 전시 '화가 박수근의 서울'(~2022.3.1)

by ㅊㅈㅇ 2022. 1. 11.

 

아라가 추천해준 알바. 이미지줌 이라는 영상 제작업체가 이번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리는 박수근 전시 홍보 영상 촬영을 맡았는데, 시나리오를 쓸 방송작가를 찾는다고 했다. 그런데 자료도 워낙 방대하고 팩트 체크도 중요하니 담당 학예사가 미술사 전공자가 했으면 좋겠다고 요청하여 내가 하게 됐다. 몇백 페이지 분량의 방대한 자료들을 읽고 요약하는 작업이었는데, 상당히 재미있고 즐거웠다. 중학생이 들어도 알기 쉽게 써달라는 게 미술관 측의 요구 사항이었다. 

화가 박수근의 서울 이라는 제목으로 유투브에 업로드 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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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puBa3CBl_a8 

우리가 매일 지나다니며 보는 서울의 공간들. 그럼 박수근이 살았던 70여 년 전의 서울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을까요? 한국전쟁(1950-1953) 이후 서울은 폭격으로 황폐화되어 버렸는데요. 모두가 가난하고 어려운 삶을 살던 그 시절, 박수근은 어떻게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을까요? 박수근이 살았던 지역인 창신동, 일을 했던 PX, 그리고 작품 판매가 이루어졌던 반도화랑. 이렇게 세 장소를 중심으로 박수근의 자취를 따라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창신동

먼저 살펴볼 곳은 창신동입니다. 동대문쇼핑센터와 동대문 너머에 위치한 창신동은 지금도 의류 봉제공장들로 잘 알려진 지역인데요. 이런 특성은 1930년대부터 시작되었는데, 일찍이 창신동은 옷감을 파는 곳인 포목시장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일자리가 많았는데요. 해방 이후에는 지방에서 올라온 이주민과 피난민, 저소득 노동자들이 창신동에 많이 몰렸습니다. 또한 청계천변과 낙산으로 이어지는 산비탈에는 임시로 지은 판잣집이 많이 들어섰어요. 남쪽으로 피난 온 박수근 역시 창신동에 정착했습니다.

창신1동 일대를 지나 동묘역 쪽으로 걸어오다 보면 대로변에 조그마한 국밥집 하나를 발견할 수 있는데요. 바로 이곳이 박수근이 살던 집입니다. 박수근은 이 집에서 1953년부터 1963년까지 10년을 살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가족들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매일 아침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창신동 집 마루에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건넌방은 세를 주었고, 안방에서 온 가족이 다 함께 생활했기 때문에 그림 그릴 공간이 없어 대청마루에서 그림을 그렸던 것이죠. 그는 그렇게 가족들이 생활하는 모습을 보면서, 온갖 생활소음을 들으며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러다 오후 5시쯤에는 시내로 나가 전시회도 보고 지인들도 만났어요. 그때 그는 길가에 앉은 노인들, 행상들, 골목에서 뛰노는 아이들 등 매일 같은 풍경을 마주했어요.

박수근은 자신의 작품에 이러한 일상의 풍경을 그렸는데요. 박수근은 각박한 현실 속에서도 정직하고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이웃의 모습을 애정을 가지고 바라보았고, 그들을 그림으로 그렸어요. 박수근은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예술에 담아야 한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평범한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어린아이들의 이미지를 그렸습니다. 이렇게 박수근의 그림에 여인, 노인, 아이들이 주로 등장하는 이유는 한국전쟁으로 인해 많은 남성들이 죽거나 다쳐서 남편 대신 가족을 부양해야 했던 여성들이 늘어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박수근의 삶의 터전인 창신동의 풍경은 한국전쟁 이후 우리나라의 사회상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PX

이번에는 그가 일했던 장소인 PX로 이동해 볼게요.

박수근이 일했던 PX는 현재 신세계백화점 본점 건물에 있었는데요. 이곳은 한국전쟁 이후 동화백화점이었다가 미군 PX로 사용됐습니다. PX는 포스트 익스체인지(Post Exchange)의 줄임말로, 미국인들에게 생활필수품을 저렴하게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진 장소였습니다. 이곳에서는 실생활에 필요한 모든 물건들이 거래되었습니다. 럭키스트라이크 같은 미제 담배부터 수입 잡지까지 없는 게 없었죠. 당시 대부분의 서민들은 먹을 것조차 충분하지 않았던 시기인데요. 이곳에서 볼 수 있는 외국의 물건들은 이국적인 활기를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당시 서울은 전쟁 때문에 폐허가 되어 있었어요. 소설가 박완서의 회고에 의하면, 중앙우체국 같은 경우에는 다 타버리고 위쪽 천장에 구멍이 뻥 뚫린 채 벽만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서울의 분위기 속에서 PX는 주변과 대비되어 화려하고 반짝이는 것들로 가득 차 있는 신세계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장소에서도 박수근의 시선이 머문 것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어려운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그의 시선을 <실직> <청소부> 같은 작품에서 확인해볼 수 있는데요. <실직>이라는 작품에는 두 남자가 위 아래에 각각 그려져 있습니다. 위쪽 인물이 무기력하게 누워 있다면, 아래쪽 인물은 중절모를 쓰고 앉아 있어요. 실직으로 인해 실의에 빠진 두 인물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그린 그림이에요.

원래 박수근의 가족은 지금은 북한 땅인 금성에 살고 있다가 한국전쟁 때 월남을 했습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상태에서 생활을 꾸려 나가기 위해 그는 PX에서 초상화를 그리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값싼 스카프의 모퉁이에 초상화를 그려 넣는 일을 하면서 박수근은 갖은 수모를 겪었습니다. 하지만 박수근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 이 일을 묵묵히 참으면서 했습니다. 그렇게 박수근의 아내는 남편이 PX에서 일하며 번 돈을 열심히 모아서 창신동에 집을 샀습니다.

박수근의 삶에서 PX는 매우 중요한 장소인데요. PX의 초상화부에서 함께 일하던 박완서가 훗날 소설가가 되어 박수근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나목』을 썼기 때문입니다. 박완서는 『나목』이라는 소설을 쓰게 된 이유를전쟁 후의 암담한 서울에서 술에 취하지도 않고 붓을 놓지도 않고 가족의 부양도 포기하지 않고 살았던 그의 모습을 증언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박수근은 창신동에 집을 마련하고 난 뒤에는 PX일을 그만두고 전업화가로 활동하게 되는데요. PX에서 그의 그림에 관심을 가진 미군이 물감과 캔버스를 구해준 것이 계기가 되었어요. 그림에 몰두하면서 그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 , 국전에 작품을 출품하기 시작했습니다. PX를 그만 둔 후에도 박수근은 명동을 오가며 화방에서 그림재료도 사고, 다방에서 다른 예술가들을 만나기도 하고, 명동의 거리에서 일본의 미술잡지도 구입했습니다. 명동은 그에게 있어 창신동 변두리의 삶에 매몰되지 않고 변화하는 세상을 감지하게 해준 공간인데요. 이곳에서 박수근은 화려한 미국의 문화와 함께, 새로운 미술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박수근이 월남한 이후 생전에 개인전을 연 것은 용산 주한미군사령부(SAC) 도서관에서 열린 전시뿐인데요. 이처럼 미군부대에서 미술전시를 열었던 것은 전쟁 후라는 특수한 시대 상황을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PX에서 번 돈으로 전업화가로의 삶을 시작하게 된 박수근은 반도화랑을 통해 외국인들에게 작품을 판매하는 것으로 이후의 생활을 이어 나갈 수 있었습니다.

 

반도화랑

반도화랑은 지금의 롯데호텔 서울점 자리에 있던 반도호텔 내부에 있던 화랑인데요. 반도호텔은 1938년 일본인이 설립한 호텔로,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한미 두 정부의 협력을 상징하는 명분으로 미 대사관으로 사용됐습니다. 전쟁으로 폭격의 피해가 컸던 반도호텔은 1953년 정부가 매입해 1954년 외국인 전용호텔로 개장했습니다.

그리고 반도화랑은 1957 1월 비상업적 성격의 화랑으로 반도호텔에서 시작됐습니다. 이곳에서는 황폐화된 서울의 모습과는 달리 주기적으로 댄스파티와 문화행사가 열리는 최신식 문화공간이었는데요. 초기 반도화랑은 반도호텔에 투숙한 외국인이나 상사 주재원을 대상으로 한 비영리 문화공간이었습니다. 반도화랑은 1957년 아시아재단의 후원으로한국 현대미술을 소개하고 작품 판매를 통해 자각들을 지원하고자본격적인 상업화랑으로 운영되었습니다. 당시 박수근의 작품 구매자들은 대부분 외국인들이었는데 이들 사이에서 박수근의 그림이 꽤 인기가 있었습니다. 박수근의 그림에 매료된 외국인들은 박수근이 작품 활동을 지속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렇게 도움을 준 사람들로는 미국 무역상사 주재원 부인인 실리아 짐머맨, 한국주재 미국상사 직원 부인 마거릿 밀러, 미국대사관의 문정관 부인 마리아 헨더슨입니다. 그중에서도 마거릿 밀러는 반도화랑에서 본 박수근의 작품에 매료되어 미국으로 돌아간 후에도 박수근과 연락을 지속하면서 미국에 작품을 판매해주었습니다. 그녀는 박수근과의 편지에서 작품의 소재와 색채 등 전반적인 부분에 대해 의견을 교류했고, 국전에 낙선한 뒤 실의에 빠진 박수근을 격려하기도 했습니다. 1964년 마거릿 밀러는 박수근에게 로스앤젤레스에서의 개인전 개최를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박수근은 마흔 점에서 쉰 점(40~50) 정도의 작품을 의욕적으로 준비했지만, 결국 전시는 여러 사정으로 불발됐습니다. 개인전을 개최하지는 못했지만, 마거릿 밀러의 개인전 제안은 박수근으로 하여금 더욱 열정적으로 작품 활동에 매진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박수근은 판매를 위해 3호에서 4호 크기의 작은 작품들을 많이 그렸는데요. 그는 당시 작품 판매만으로 생활하는 몇 안 되는 화가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박수근은 작품의 판매실적을 확인하고 화가들을 만나기 위해 매일 반도화랑에 나갔어요. 명동의 지인들과 술자리를 가지며 어울리기도 했고요. 이처럼 반도화랑은 우리나라 최초의 상업화랑으로 미술시장이 활성화되지 않았던 시기에 박수근의 그림이 세계로 소개될 수 있도록 해준 창구였습니다. 박수근이 사망한 후 1970년대 말, 그의 그림 가격이 급격히 상승하면서 해외로 나간 박수근의 작품들이 비싼 값으로 대거 국내로 들어오기도 했는데요. 박수근이 주목받기 전 일찌감치 그의 진가를 알아준 사람들 덕분에 박수근이 많은 작품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박수근은 전쟁 후 피난민으로 서울에 정착한 이후, 창신동을 중심으로 평범한 사람들의 생활을 관찰하고 그들을 그림으로 남겼습니다. 아이들, 여인, 노인, 실직자 등 한국전쟁 후 황폐화된 서울에서 일상을 이어가던 사람들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봤어요. 또한 PX와 반도화랑이라는 공간을 통해 전쟁 후 한국을 지원했던 미군, 외국인들과 관계를 맺으며 화가로서의 활동을 이어나갔습니다. 박수근이야말로 1950년대와 1960년대 현실을 고스란히 껴안으며, 시대를 기록했던 화가였습니다.

이렇게 서울에는, 곤궁한 생활 속에서도 화가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성실하게 당시의 풍경을 그림으로 담았던 박수근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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