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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4. 전시 서문

이재훈 개인전 <조원술연습: 초식편>(수애뇨339) 전시서문

by ㅊㅈㅇ 2021. 11. 17.

 

한국화 재료를 이용해 지금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잘 활용한 작품을 만나는 것은 어떤 면에서 쉽지 않은 일이다. 일부 대학의 동양화과는 근래에 폐지 혹은 통폐합되며 자취를 감추었다. 이러한 흐름은 전통 재료를 활용해 동시대미술씬에서 활동을 지속해나가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방증한다. 세계적인 무대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한국 작가들을 보아도 전통재료를 쓰는 경우는 흔하게 보기 어렵다. 서양의 문법이나 표현방식을 잘 사용하되 주제적인 면에서 한국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내용을 다루는 경우가 많은 듯하다. 한국화, 동양화, 전통적, 한국적, 국제적 이런 단어들을 쓰기가 참 조심스럽다. 단어의 의미를 곱씹으며 한 단어만 가지고도 긴 지면에서 이야기할 수 있을법한 큰 단어들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전체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생각하며 다소 무디게 넘어가는 지점들도 너른 양해를 바란다.

중앙대 한국화과에서 학부와 석사 과정을 마친 작가 이재훈은 오랜 기간 한국화 재료의 특성과 표현방식에 대해 공부하고 연구하며, 현대미술로서의 한국화의 확장가능성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왔다. 2017년부터 진행해 온 <조원술연습(造園術練習, Study for gardening)>에서는 한국화 재료를 이용해 구현할 수 있는 추상미술에 관한 작가의 견해를 살펴볼 수 있다. 추상미술이야말로 20세기 서양의 현대미술사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경향 중 하나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나타난 앵포르멜, 단색화를 비롯한 여러 추상 회화는 많은 비판을 견뎌내야 했다. 비판의 가장 쉬운 방식은 서양의 것을 모방하는 데 그쳤다는 이유를 대는 것이었다. 물론 그 비판에 다 동의하지는 않는다. 수많은 연구를 통해 각 작가의 개별적 특성이나 한국의 당대 상황과 맥락에서 나온 독특한 작품이라는 주장도 무수히 많다. 그렇다면 한국화의 전통재료를 이용한 추상회화란 가능할까? 불가능하다면 왜 불가능한가? 가능하다면 어떤 변용이 이루어져야 하는가? 이것이 아마도 작가가 고민해 온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동양화를 말하면서 항상 언급되는 단어 중 하나는 와유(臥遊)’. 풀이하면 누워서 유람하다는 뜻이다. 중국 남북조시대 이론가인 종병이 노쇠하여 직접 산을 유람할 수 없자, 명산의 모습을 화폭에 담아 집 안에 걸어두고 누워서 바라보며 즐긴 것에서 유래한다. 그는 이를 육체적 한계에서 벗어난 정신적 해방으로 보고 정신수양으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감상자는 그림을 보며 정신적 자유로움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재훈은 정신적인 것을 말하는 것 만으론 충분치 않다고 말한다. 한국화에서는 선이 매우 중요하다. 선 몇 개를 그어놓고 난초라고 말하기도 하고, 선 몇 개로 이어진 것이 산세를 드러내기도 한다. 사실적으로 그리는 것이기도 하고, 또 아니기도 하다. 연결해서 생각해볼 수 있는 중요한 개념으로 사의(寫意)’가 있다. 문인들은 서예의 필법에 숙련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각 필 획에 사람의 뜻과 인격이 담겨있다는 생각이다. 다시 말해, 그린 대상이 실제와 닮지 않았더라도 화가의 뜻이 표출되면 되는 것이다. 그러니 동양화, 한국화에서는 어찌 보면 모든 그림이 추상성을 담보하고 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이재훈은 기존 재료만을 이용해서는 추상회화가 양식적, 재료적으로 맞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자신만의 방식을 만들어나가기 시작한다.

가장 이번 수애뇨339에서의 개인전 <조원술연습: 초식편(招式篇)>은 앞서 언급한 작가의 고민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전시다. 먼저 전시와 작품 제목인 <조원술연습: 초식편>을 살펴보자. 작가 이재훈은 단어의 의미나 어원에 깊은 관심을 보여왔다. 그래서 자신의 작품 시리즈에도 한자어를 활용해 이름을 붙였다. 조원술이란 정원을 가꾸는 기술이라는 뜻을 갖는다. 그림 그리는 행위를 정원을 가꾸는 것에 비유해서 말하는 것이다. 무언가를 인공적으로 만들어내는 행위라는 점에서 정원 가꾸기와 그림 그리기는 비슷하다. 정원이란 인공적으로 가꾼 장소다. 보통 공간(space)이라고 하면 균질하고 객관적인 추상화된 의미가 있고, 장소(place)는 주관적 체험과 함께 구체화된 의미가 있다. 즉 공간에 가치나 경험이 더해지면 장소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정원은 장소다. 일반적으로 산수화를 말할 때는 자연이라는 공간의 개념이 더 강하다면, 이재훈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어떤 장소에 더 가깝다. 콜론 뒤에 붙인 초식은 무협물에서 공격이나 방어를 하는 기본기술을 연결한 연속 동작이라는 사전적 의미가 있다. 그러니까 이재훈은 자신의 시리즈인 조원술의 기초가 되는 틀을 만들어 이번 전시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재료를 살펴보자. 이재훈은 기본적으로는 종이에 먹을 사용하고 있지만, 그 이외에도 다른 재료들을 많이 섞어 쓴다. 석회를 장지 위에 바르고 가볍고 말수 있는 형태로 제작해서 화판에 붙인다. 그리고 뒤에서 먹을 스미게 하여 물질감과 두께감을 만든다. 그의 작품은 석회의 사용을 통해 돌이나 콘크리트 블록을 연상시키는 물질감을 획득한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촉각적 회화라고 지칭한다. 기존의 벽화 방식과는 달리 가벼운 지지판 위에 석회와 먹을 이용해 회벽의 물질감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 위에 목탄을 이용해 드로잉을 하는데, 그때 그것을 정착시키기 위해 아교(접착제)를 분부하는 과정에서 우연적인 흔적이 생기고 드로잉이 일부 변화된다. 아교를 뿌리면 수정이 어렵다 보니, 물을 뿌리는 중간과정을 넣어 최대한 의도한 대로 수정할 수 있는 시간을 벌기도 한다. 물이 많이 스미면 지워지지 않기도 하는데, 그때에는 타협하고 받아들이기도 한다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이재훈의 작품은 마치 부조(浮彫)처럼 보인다. 부조는 평면 재료 위에 높낮이를 만들어 표현하는 조각기법으로, 음각과 양각의 방식을 떠올리게 한다.

이번에는 화면 위에 나타난 이미지를 살펴보자. 그는 자신의 작품을 재현적 추상이라고 말한다. 쉽게 말해, 추상적 조형 형식 위에 재현 미술의 요소를 더했다는 뜻이다. 구름, 나무 풀, , 무지개, , 나무 등 자연의 풍경을 연상케 하는 요소들도 발견할 수 있지만, 동시에 각기 다른 굵기와 질, 형태를 가진 무수한 선들을 함께 볼 수 있다. 그래피티처럼 보이는 선, 뿌려진 것처럼 보이는 선, 굵고 진하게 그어진 선, 날려서 그어진 선 등 선으로 표현할 수 있는 모든 방식이 활용된 듯 보인다. 작가에게 선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 그것은 선이 항상 시작과 끝을 가지기 때문이며, 시간을 중시하는 독특한 사유방식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일종의 기호이다 보니 다른 부분과 대조되어 더 쉽게 눈에 들어오는 요소로 별, , 태양이 있다. 작가는 이것이 서적에 그 작품에 대한 감상이나 기록을 적은 제발(題跋)의 형태에서 변형된 것이라고 언급한다. 그가 만들어낸 정원은 그렇게 자연을 닮았기도 하고, 또 그렇지 않기도 한 셈이다.

한국화의 재료를 활용한 동시대적 회화의 실험을 해 나가는 일이란 어쩌면 매우 고독하고 지난한 시간이 보내야 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무예(武藝)란 단순한 싸움의 기술뿐 아니라 그것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키는 데에 목적을 둔다. 그가 이번 전시를 통해 스스로 확립한 기본적인 무예 기술을 통해 앞으로는 또 어떤 기술을 선보일지 기대해본다.

 

2021.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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