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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4. 전시 서문

이채연 개인전 <엄마에게>(청주시립미술관 오창관) 전시서문

by ㅊㅈㅇ 2021. 12. 1.

나의 엄마와, 엄마가 된 나에게


엄마. 엄마가 직접 되어보기 전에는 엄마의 마음을 잘 헤아리지 못했던 것 같다. 나와 가족들을 위해서 엄마가 어떤 희생을 해왔는지, 부모의 마음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지금까지 나에게 베풀어준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솔직히 잘 알지 못했다. 뒤늦게 내가 엄마가 되고 나니 엄마가 조금은 다르게 보인다. 엄마의 입장이 되어보니 생기는 고민들도 알게 됐다.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경험해보고 나면 더 깊게 공감할 수 있게 되는 그런 것 말이다.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면서, 내가 가는 길을 이미 한 세대 전에 걸어간 엄마를 떠올리는 것은 어쩌면 엄마이자 여성인 창작자로서 당연히 거치게 되는 과정인 것 같다. 가장 개인적이고 내밀한 개인사적 이야기에서 시작되는 엄마에 대한 복잡 미묘한 감정(고마움, 답답함, 안쓰러움, 불쌍함 등)은 사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모두가 느끼는 보편적인 것이기도 하다.
작가 이채연은 한지에 분채를 사용해 민화와 닮은 그림을 그린다. 민화는 정식 그림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 그린 규범이나 관습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그림으로, 생활공간을 장식하기 위해 그린 실용화를 의미한다. 소박하고 솔직한 것이 특징으로, 부귀, 장수, 다산, 다복을 기원하는 실용적 목적을 가졌다. 복 받기를 바라는 옛 사람들의 일상과 소망을 알 수 있다. 민화는 병풍으로 만들어 제사, 생일 등 기념일에 사용됐다. 작가는 이전까지는 다른 스타일의 작업을 해왔으나 태어날 아이의 방에 그림을 하나 걸어주고 싶다는 단순한 소망에서 민화를 시작하게 되었다. 민화는 장르의 특성상 창의적인 구성보다는 형식화된 유형에 따라 인습적으로 계승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작가는 2021년을 살아가는 자신만의 이야기를 담기 위해 동시대 이미지로 변형하거나 일부 상징만 차용하는 방식으로 자신만의 색을 찾아 나간다.

자화상(2021), 가족을 위한 축복(2021)

대파로 표현한 엄마 그리고 나
청주시립미술관 오창관에서 열리는 이채연의 개인전 <엄마에게>(2021.12.1~14)는 말 그대로 엄마에게 보내는 편지 같은 전시다. 30여 점의 작품들은 크게 몇 가지 카테고리로 분류해볼 수 있는데, 엄마가 된 나의 모습, 엄마와 나의 공통된 소망인 행복한 가정에 대한 염원, 자유에 대한 갈망,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이상향의 실현, 엄마에 대한 안쓰러움 등을 작품에서 읽을 수 있다.
이채연의 작품은 가장 먼저 엄마가 된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의 작품에는 대파를 그린 작품들이 꽤 있다. 미대 입시를 하면서 줄곧 그렸던 파. 작가는 미대에 진학하고 혼자 서울에서 어렵게 생활하면서 비교적 저렴한 식재료인 파를 많이 먹었다고 한다. 많은 음식에 약방의 감초처럼 쓰임이 많은 파는 주재료는 아니더라도 없어서는 안될 그런 부재료다. 결혼을 하고 나서는 마트에서 파를 구입해서 가는 사람은 기혼자인 경우가 많은 것 같다는 생각을 문득하게 됐고, 작가 자신의 상징으로 파를 그리기 시작했다. <자화상>(2021)에서는 아무런 배경 없이 파 한 대가 그려져 있다. 마치 사진관에서 찍은 증명사진처럼 양팔을 가지런히 늘어뜨린 파는 여리면서도 동시에 단단한 모습을 드러낸다.
<학교갔다 돌아오니 엄마가 ^^얼굴로 맞아주셨다>에서는 엄마 역시 파로 표현됐다. 대의 끝부분이 꺾어져 마치 눈웃음을 표현하는 이모티콘 ^^ 과 닮은 모습이다. 파로 장식된 도자기에 한 떨기 꽃송이처럼 가지런히 꽂혀 있는 모습이 해학적으로 느껴진다. <it’s your turn>은 빨간 고무장갑에 대파가 가로로 잡혀 있는 모습이다. 작가의 모친이 결혼한 자신을 쳐다보는 표정이 마치 바톤을 넘겨주는 이어달리기 주자처럼 느껴진 적이 있었다고 한다. 파로 분한 엄마 혹은 작가 자신의 모습은 여러 작업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발광하는 광물 위에 걸터앉아 다리를 꼬고 요염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파를 그린 <주목받고 싶은 파>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실소를 자아내게 만든다. 무대의 중심에 있지 못한 어떤 존재가 사람들의 관심 받고 싶은 숨겨진 욕망을 드러낸다.

Sweet Home(2017), 걸어두면 좋을 것 같아 그린 그림(2016)

행복한 가정에 대한 염원
<가족을 위한 축복>(2021)은 제목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행복한 가정에 대한 염원을 담은 작업이다. 수박이나, 복숭아 등 몇몇 과일이 한데 모여 있고, 그 주변을 기다란 대파가 하트모양으로 둘러싼 모습이다. 각기 다른 크기와 종류의 과일은 평온한 전원 풍경을 배경으로 덩그러니 그려져 있다. 이채연의 작품에는 초현실적인 특성이 도드라진다. 초현실주의(Surrealism)는 자신의 내면에서 보이는 것을 뚜렷하게 그려내는 화풍 중 하나로, 무의식이나 꿈, 환상의 세계를 현실세계보다 더 정확하고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더욱 신비감을 나타내는 특성을 가진다. 이채연이 그린 대상 하나하나는 매우 구체적이고 사실적이지만, 배경과 함께 그 전체를 보게 되면 어딘지 모르게 가짜 같기도 하고, 이성적으로 명확하게 설명하기 어려운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Sweet Home>과 <걸어두면 좋을 것 같아 그린 그림>은 그림 안의 그림 같은 액자 구성을 가진 작품으로, 작가의 세 가족, 남편과 자신과 아들을 상징하는 세 개의 알이 중앙에 그려져 있는 작품이다. 전통과 현재, 동양과 서양적 요소들이 자연스럽게 뒤얽혀 있는데, 이러한 이질적인 도상들의 혼용은 자연스러우면서도 낯설고, 키치(Kitsch)적으로 느껴진다. 키치란 고미술품을 모방한 가짜 복제품, 유사품, 통속미술작품을 의미하는데, 조악한 감각으로 만든 미술품이나 대중 취향의 대중문화를 지칭한다. 가족의 건강과 행복, 부귀영화를 바라는 내용처럼 느껴지는데, 봉황이나 날개, 쌀밥, 연꽃, 하트, 장미 등 각각 다른 배경에서 사용된 상징들이 한 화면에 어우러지면서 그것이 현실이 아닌 이상향임을 강조하며 화려한 표면 뒤의 씁쓸함 같은 것들을 상상하게끔 한다.

삼대 모녀의 여행(2018), 엄마, 미투하시고 여행을 떠나요(2018)

자유를 향한 갈망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이 우울증을 겪는다는 기사를 읽은 기억이 난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스러운 새 생명을 만나게 된 기쁨과 함께, 아이가 없던 시절의 삶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삶의 모든 부분이 아이를 중심으로 재편되는 경험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혼자서 보내는 자유로운 시간을 가지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혼자 있는 시간에도 아이를 위해 음식을 준비하거나 필요한 것을 구입하거나 청소를 비롯한 각종 집안일을 하면서 배우자와 아이를 위해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면서 창문 밖으로 보이는 마트 오픈 기념 풍선을 본 작가는, 그 어디에도 매이지 않은 상태로 하늘을 훨훨 나는 풍선을 보고 자유를 갈망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고 언급했다. 외조모와 모친, 그리고 자신, 3대에 걸친 세 여자가 함께 여행하는 일이 한 번도 없었던 것을 떠올리며 떠나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결국은 떠날 수 없는 운명을 표현하였다.
<엄마 미투하시고 여행을 떠나요>에서는 바구니에 가지런히 담은 파 한 단에 셀 수 없이 많은 분홍 풍선을 매달아놓았다. <기억>에는 새장 안에 갇히지 않은 대신 그 바깥에서 평화롭게 앉아있는 새를 그렸고, <모녀>에서는 조금 더 직설적으로 젊은 시절의 모친과 작가 자신의 모습을 함께 그렸다. 무지갯빛의 식물 뒤로 어렴풋이 보이는 모녀의 모습은 자못 행복해 보인다. 분명히 밝은 색채로 웃는 모습을 담고 있지만 시간을 되돌릴 수 없기에 더욱 서글픈 느낌을 준다.

엄마에게(2015)

엄마의 이루지 못한 소원
전시의 제목과 동명의 작품인 <엄마에게>는 이번 전시의 주제를 가장 집약적으로 담고 있는 작품인 것 같다. 작가의 모친은 남편의 잦은 외도로 오랜 기간 고통받아왔으며, 아들이 병마와 싸우고 있는 상황에 있다. 가족을 위해 인내하고, 보살피는 일에 매진하면서 많이 지쳐있으면서도 끊임없이 가족을 위한 걱정을 하며 삶을 지탱해나가고 있다. 자녀가 좋아하는 맛있는 반찬을 싸주지 못했던 것에 대한 후회, 좋은 장난감을 때때마다 사주지 못했던 것에 대한 아쉬움, 값비싼 과일을 때마다 먹이지 못한 미안함 등 모친의 소회를 지속적으로 들으며 성장해 온 작가는 모친의 못 이룬 소원을 작품에서라도 이뤄주고자 이러한 그림을 그렸다. 집안에서 모친의 유일한 휴식처가 되었던 부엌은 잡지에서 찾아 최신식으로 그렸고, 오븐에는 멋진 칠면조가 구워지고 있으며, 창밖에는 석류나무와 장독대가 있고, 한 구석에는 모친이 수놓던 작업이 완성되어 걸려있으며, 바나나와 멋진 장난감들로 가득 차 있다. 흔들의자에 앉아 주름이 많은 분홍 원피스를 입고, 아기를 품에 안고 있다.
<엄마에게>는 영국 팝아트 작가인 리처드 해밀턴(Richard Hamilton)의 <도대체 무엇이 오늘날의 가정을 이토록 색다르고 매력 있게 만드는가?>(1956)을 떠올리게 한다. 평범한 가정의 거실 모습을 대중문화에서 오려낸 각종 이미지들로 콜라주한 작품이다. 해밀턴의 작품이 익명의 존재들로 채워진 소비지향주의 사회의 한 모습이었다면, 이채연의 작품은 자신의 가족과 그들의 이루어지지 않은 소망들로 채운 이상향을 담았다.
마지막으로 세폭화(Triptych)로 제작해 병풍으로 만든 작품 <엄마의 방>이 있다. 그림을 그린다고 말하면 병풍을 하나 그려달라고 부탁했던 모친의 소원대로 이런 작품을 제작하게 됐다. 중앙에는 병풍 안의 또 다른 병풍이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탈북자 집의 장롱 문양에서 따온 것으로 오리, 학, 소나무 등이 어우러진 모양이다. 장롱의 오른쪽 위에는 “사랑하는 딸아 씩씩하고 건강하게 살아라”라고 적힌 돌에 글씨를 새긴 관광 상품이 무심하게 놓여있고, 왼쪽에는 대파와 양파가, 오른쪽에는 진귀한 화분들이 그려졌다.


나의 엄마와 엄마가 된 나에게
작가가 자신의 모친에게 전하고자하는 말에서 시작된 지극히 개인적 서사를 담은 이 전시는 지극히 사적이고 내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이채연의 작품과, 그가 작품 활동을 이어가는 행위 그 자체는 배우자와 자녀를 위해 보이지 않는 헌신과 희생으로 가족을 지탱해나가는 우리 시대의 모든 엄마들에게 작은 위로를 건넨다.


2021.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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